후베이성우한,과거와근현대가함께고동치는도시

China (Korean) - - 지방순례 -

글|천커(陳克) 사진|사도다마코(佐渡多眞子)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은 중국 중부 지역 중에서도‘심장’에 위치해있다. 우한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베이징(北京)과 톈진(天津)이, 남쪽으로는 광저우(廣州)가, 서쪽으로는 청두(成都), 동쪽으로는 상하이(上海)가 모두 비슷한 거리로떨어져있기 때문이다.

창장(長江)과 한강(漢江)이 이곳에서만나 우창(武昌), 한커우(漢口), 한양(漢陽)으로 우한을 삼분(三分)한다. 고대에는창장을 따라 서쪽 위로는 파촉(巴蜀), 동쪽 아래로 오월(吳越), 북쪽으로 한수(漢 水)를 거슬러 예섬(豫陜)에 이르고, 동정호(洞庭湖)를 지나 남쪽으로는 상계(湘桂)에 이르기 때문에 예로부터 우한은‘구성통구(九省通衢)’라는 별칭이 있었다. 오늘날의우한은창장황금수로와 베이징-광저우를 잇는 징광(京廣)철로의 대동맥이 만나는 곳으로서, 내륙 최대의 수륙교통 중심지이자중부지역의핵심도시로자리를잡아가고 있다.

우한은 고대 형초(荊楚)문화가 기원한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우한에는형초문화특유의걸출한능력과불굴 의 의지를 갖춘 사람들이 많았다. 근대에들어서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일어나면서 경제적 중심지로도 부상했다. 또 우한에서 처음 시작된 우창(武昌)봉기는 신해혁명에 신호탄을 울리며 중국의 근대사에깊은영향을 미쳤다.

황학이 날아오르는 서정과 낭만의공간

“오랜 친구는 황학루를 떠나 아지랑이 일고 꽃피는 삼월 양주로 가네(故人西辭黃鶴樓 煙花三月下揚州).”

당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 이백(李白)이 쓴 <황학루송맹호연지광릉(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황학루에서 광릉으로 떠나는맹호연을 배웅하며)>는 중국에서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는 시이다. 이시에 등장하는 황학루는 창장 남쪽 강가의 우창 서산(蛇山·사산) 정상에 위치해 있다. 황학루는우한의대표적인상징물이면서 후난(湖南)성의 악양루(嶽陽樓), 장시(江西)성의등왕각(滕王閣)과 함께‘강남(江南) 3대명루(名樓)’로도 꼽힌다.

기록에 따르면 황학루의 원래 위치는우창서산의황학 기두(磯頭·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이고 한 면이 강가와 맞닿은 자갈밭) 부근으로, 삼국시대 동오(東吳) 황무(黃武) 2년(223년)에 지어지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황학루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이중산에서명칭이비롯됐다는설은당나라때 <원화군현도지(元和郡縣圖誌)>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당시 손권이 하구(夏 口)에 고성(故城)을 짓던 것을 두고“성의서쪽으로는 큰강과 잇닿고, 강의 남쪽모서리는 기두를 누각으로 삼으니, 이를 황학루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손권은‘무(武)를 통해 나라를 통치(治国)하고 번성(昌)하게’하기 위해(우창이라는 명칭의유래) 성을 쌓아 수비를 하고, 누각을 지어 멀리서 적의 동향을 조망했다. 이때문에 황학루는 어느 정도 군사적 색채를 띠기도 한다.

황학루는 당나라에 이르러 점점 문인들이 자주 찾는 명소로 변해 갔고, 문인들은 이곳에서 후대에 오랫동안 회자되는여러 걸작을 탄생시켰다. 특히 당나라 시인 최호(崔顥)가‘황학루(黃鶴樓)’를 통해“옛 선인 오래 전 황학 타고 떠난 뒤, 여기에는 비어있는 황학루만 남았네. 이미떠난 황학은 다시 오지 않으니, 흰 구름만천년동안빈 하늘을 오가네(昔人已乘黃鶴去, 此地空餘黃鶴樓. 黃鶴一去不復返,白雲千載空悠悠)”라고 읊은 이후에는 그 명성이더욱 자자해졌다.

이 밖에도 이백, 백거이(白居易), 왕유(王維), 이상은(李商隱), 두목(杜牧)을비롯해 후대의 소식(蘇軾), 육유(陸遊),악비(岳飛), 문천상(文天祥), 장거정(張居正), 임칙서(林則徐) 등의 여러 문인 대가들이황학루를주제로아름다운시편을여럿 남기면서 황학루에는 낭만과 서정성이더욱 짙어졌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빈번했던 전쟁 탓에 황학루는 수없이 훼손됐다가 재건되는등꽤나 기구한 운명을 겪었다. 명나라와 청나라 때에는 7번이나 소실됐고, 재건과 수리만 10번을 거쳤다. 마지막 누각은 청나라 동치제 7년(1868년) 때 지어졌다가 광서제 10년(1884년)에 다시 소실되었다. 이후 근 100년 간은 재건이 이뤄지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보는 황학루는1981년에 재건을 시작해 1985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새롭게 태어난 황학루는 높이 51.4m의 5층짜리 누각이다. 꼭대기가

뾰족하게 솟아 있고 누각 전체가 황금색유리 기와로 치장되어 겉모습이 장엄하기그지 없다. 각 층은 대형 벽화와 주련(柱聯) 및각종문화재등으로꾸며져 있다.

황학루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면 우한에있는세 진(鎭)의 풍경이한눈에들어온다. 그 중에서도 유유히 흐르는 창장과1957년에 건설되어 우창과 한양을 잇는창장대교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고속철도가 바람을 가르며 창장대교 위의 징광철로를 따라 황학루 앞을 지나는 모습을보고 있노라면, 역사와 현대가 절묘하게교차하는 모습에 입에서 절로 감탄이 나 온다.

한커우, 우한 근대화의 중심지

창장을 사이에 두고 우창과 마주보고있는 한커우는 이미 우한의 최대 상업 중심지로 거듭났다. 예로부터 땅이 평탄하고하류가종횡으로흘러수상교통이발달하고항구로서의기능이우수했던 까닭에,청나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저장(浙江), 장쑤(江蘇), 광둥 등 주변 지역의 각종 상인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어 상업활동과 무역을 전개했다. 부두로 통하는 길이 생기고도시가발달하자한커우지역에는점점우 한만의 독특한‘항구 문화’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는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1861년 청나라 정부가 서구 침략자들과 맺은 불평등조약으로 인해한커우에는 강제로 외부와의 통상항구로서 해관(海關)이 설치된다. 이것이 바로1861년 1월 생겨난 한커우의 해관인‘장한관(江漢關)’이다. 통계에 따르면 1865년부터 1937년까지 장한관에서 거둬들인세수는‘톈진을 능가하며 상하이를 바짝뒤쫓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내륙 항구로서연해통상항구에필적할만한기능을지닌 항구였다.

1922년 11월 장한관은 설치 60주년을 맞아 한커우 톈진루(天津路) 일대 강변에서지금의 옌장다다오(沿江大道) 장한루(江漢路) 입구로 이전했다. 1924년 1월 장한관 신관 건물이 공식 완공됐다. 영국고전주의 풍격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종탑을 기준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높이는45.85m, 종탑 끝까지 포함하면 83.8m에달해 우한의 세 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 꼽힌다. 장한관 종탑의 종소리는 영국황실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정시마다울리는차임처럼대를이어우한사람들의기억 속에 영원히 각인되는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근 100 년에걸쳐세월의더께가쌓인장한관은 여전히 창장 강변에 우뚝 서 있다.한 가지 달라진 점은, 과거 서양의 조계지였던 이 곳이 이제는 우한의 금융 중심지이자 핵심 상업지역으로 거듭났다는것이다. 장한관은과거중국의반식민·반봉건 시절 치욕의 역사를 목격한 산 증인이자, 중국이 쇄국의 길에서 개방과 포용의 시대로 나아가도록 만들어 준 소중한교량이기도 하다.

2012년 11월 우한 해관은 57년 간 업무를 수행해 온 장한관을 떠났다.그뒤 3년 간 리모델링을 거쳐 박물관으로 변신, 2015년 12월 28일 대중에 개방됐다.

장한관 박물관에 들어서면 한때 분주했던 해관업무를 복원한 정경을 볼 수 있

다.‘강한조종(江漢朝宗·민심은 대세의흐름에 따라 변한다는 뜻): 우한의 현대화발자취를 좇아’라는 이름의테마전은다양한문화재와사진을통해관람객들에게우한의 근대 무역이 이뤄지던 시절을 소개하고한커우조계지의과거모습과일반인들의삶의모습이어떻게변화해왔는지를소개한다. 이를통해관람객들은역사적이면서도새롭게태어나는우한의도시적흐름을찬찬히짚어볼수 있다.

박물관에서 만난 75세의 왕(王) 씨할아버지는자신이강변에살았기때문에늘장한관의종소리를들으며자랐다고 했다.할아버지는기자에게“장한관은근대이후우한의 발전 과정을 지켜본 산 증인이자압축적 상징물로, 후대에 남겨진 귀한 유산이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찾아 옛 우한의 역사를 몸소 느꼈으면 한다”고 말했다.

특색있는먹거리가 가득한‘후부샹’

우한 사람들은 아침을 먹는다는 말을‘아침을 지낸다(過早)’고 표현한다. 중국인들은 웬만큼 특별한 날이 아니면‘지낸다(過)’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새해를지내다(過年)’,‘명절을 지내다(過節)’등의예를통해서도알수 있다.

베이징, 상하이, 선전(深圳) 등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아침 한 끼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심지어 아침은 그냥거를때도 많다. 하지만 우한에서 아침 식사는 새해를 지내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한에서‘아침을 지내는것’은 거의 제대로 된 정찬(正餐)을 먹는것에 준할 만큼 중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한의아침식사종류는중국에서비교 대상을 찾기 힘들 정도로 다양하다.우한 사람들 스스로“아침만으로 우한과어깨를 나란히 할수있는 곳은 광저우(廣州) 정도는 돼야 쳐줄까 말까”라고 우스개소리로말할 정도이다.

가장 소박하면서도 고유의 맛을 가장잘 담은 음식은 종종 깊은 골목의 허름한식당에서 조우하게 될 때가 많다. 우한에서 먹거리를 파는 상점이 늘어선 골목인후부샹(戶部巷)은‘우한의 맛을 담은 최고의 먹자골목’으로 잘알려져 있다.

후부샹은 우창에서 가장 번화한 쓰먼커우(司門口)에 위치해 있다. 동쪽으로는10 리에달하는거리가이어져 있고(현 제팡루·解放路), 서쪽으로는창장과맞닿아있으며, 남쪽으로는 황학루가 버티고 있다. 쓰먼커우는 명·청 시대에 행정을 담당하는 포정사사(布政使司) 아문(衙門, 아문은‘관청’이라는 뜻)의 우창 사무처였다. 화폐와 식량, 호적을 담당했던 포정사(布政司)는 민간에선‘호부(户部)’라 불렸다. 후부샹 동쪽의 번고(藩庫)는 화폐와식량을 보관하는 금고(金庫)와 량고(糧庫) 로 나뉘었는데, 서쪽은 우창부(武昌府)의량고가 있는 곳이다. 후부샹은 바로이두곳간의중간에위치해있었기때문에지금의이름이생기게 됐했다.

항구와도 가까운 후부샹은 언제나 사람과 차량과 선박이 오가는 분주한 거리다. 후부샹의 사람들은 손재주가 좋고 부지런했다. 그들은 각종 신선한 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빠르게 만들어 내오기 때문에,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점차그명성이 알려지게 되었다. 1980~90년대에는길이 150m 폭 3m에 불과한 이좁은 거리를 매일 수백 수천 명이 방문하여 사시사철문전성시를 이뤘다.

2002년 들어 우창구가 역사문화도시로 거듭나기 위한 이미지 개선 작업에 돌입하면서 후부샹 역시 옛 모습 복원 작업에 들어갔다. 여러 해 동안 진행된 리모델링 끝에 후부샹은 좁고 붐비던 작은 거리에서 후부샹 라오샹(老巷·옛 거리), 쯔여우루(自由路), 민주루(民主路) 서쪽단으로 이뤄진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이곳에는 각종 먹거리와 휴양·오락거리가 통합된 우한만의 독특한 관광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우한의대표적 면요리‘러간몐(熱幹面)’으로 유명한 프랜차이즈 차이린지(蔡林記)를 비롯해 라오퉁청(老通城)의 떠우피(豆皮),쓰지메이(四季美)의 탕빠오(湯包), 순샹쥐(順香居)의 꽃만두 샤오메이(燒梅, 또는 샤오마이<燒麥>), 셰자(謝家)의 튀김음식 몐워(面窩) 등은 우한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 난‘맛집’이면서 우한을 찾은 관광객이라면 결코 그냥 지나쳐서는안 되는‘핫 플레이스’이기도 하다.

황학루와창장대교가아름답게어우러진모습은우한을대표하는상징이되고있다.사진/ IC

신해혁명우창봉기기념관은각종인물조각을통해파란만장했던우창봉기의역사를재현했다.

신해혁명우창봉기기념관:악군(鄂軍·후베이군)도독부(都督府)

해관업무를보던당시의분주한모습을복원한장한관박물관의전시물

장한관건물전경

러간몐,산셴떠우피(三鲜豆皮),야보(鴨脖,오리목 ),몐양싼정(沔陽三蒸)등우한의다양한음식이매우먹음직스러워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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