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na (Korean)

류리창, 300년전한중문인의‘우아한여행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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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왕멍( 王萌 ), 톈진<天津>사범대학교외국어학원­한국어과강사

베이징(北京) 허핑문(和平門) 밖에 위치한 류리창(琉璃廠)은 베이징의 유명한 문화의 거리다. 청나라 때 베이징으로과거시험을­보기위해전국각지에서­올라온거인(舉人)들이 이일대로모여들면서유­명해졌다.이후전국각지의회관도­근처에 자리잡았고 서점들도 속속 모여들어 노점을 펼치고 교실을 만들고 장서를 판매했다.관리들과과거를보러온­거인들도이곳의 책시장을 둘러보기 위해 모여들어 류리창은도성최대의문­화거리가됐다.

18세기 중후반 상문(尚文)정책을 추진한 조선 왕조는 한문 소양이 있는 학자를 사신과 수행원으로 선발해 베이징으로보냈다. 이 중에는 이후 명성을 날린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이있다. 중화문화에 심취한 그들은 당시 문화의 중심가에도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그들은 류리창을 방문해 서점을 돌아보고책을 구했으며 300년 전 양국의 문인들이류리창을 둘러보면서 나눈 우정과 경험을기록했다.

류리창을 최초로 방문하고 기록한 조선 사신은 유명한 실학자 홍대용이다. 그는 류리창을 6번 방문해 청금(聽琴), 감상, 필담, 구서(求書) 등의 활동을 했다.연암 박지원은 그의 저서 <열하일기>에서류리창을 다루면서‘천하거인과유명인사가 모이는 곳’이라고 묘사했다. 이덕무는베이징에머무­는동안류리창을여러차­례방문해조선에는희귀­하거나없는도서목록을 베꼈다. 유득공은 자신의 저서 <연태재유록(燕台再遊錄)>에 류리창에서 찾고자했던 <주자어류(朱子語類)>는 구하지 못했지만 가치있는 다른 책을 구했다고 기록했다. 이 밖에 서장보는 <계산기정(薊山紀程)>에서‘류리창 서루에 들어와 책을 뽑아읽는’장면을 기록했다.

조선 사신은 류리창에서 서적을 탐방하고 구매하는 동시에 중국 문인과 적극적으로 접촉하고 필담을 나누었다. 청나라 문인은 그들의 깊이 있는 한문 소양과박학한지식에탄­복하기도 했다. 홍대용의경우사신으로­베이징을방문해류리창­골동품점에서 저장(浙江)사람 엄성(嚴誠)과해후했다. 두 사람은 서로 방문하면서 시문을 교환했고 서로를 흠모해‘성명지교(性命之交)’를 맺었다.

유득공은 박제가와 함께 베이징을 두차례 방문해 전동원(錢東垣), 이조원(李調元), 황비렬(黃丕烈), 옹방강(翁方綱) 등을 류리창 서점에서 알게 되어 교류했다.그들은 시학을 토론하고 판본을 식별하면서 마음을 나누었다. 이런 교류를 통해조선 사신은 중국의 서적 간행 상황을 이해했고 예전에는 볼수 없었던 진본을 봤다.청나라 학자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황비렬은 고가로 구입한 고려 필사본 <논어집해(論語集解)>를 유득공에게 보이고 의견을구하고서야일본­필사본이조선에유입된­것이라는것을알게 되었다.

김정중은 1792년 동지사 수행원으로베이징을 방문했다. 그는 류리창 취호재 (聚好齋)에서 국자감 학자 정가현(程嘉賢)과깊은우정을나눈것을 기록했다. 두사람은첫대면에서부­터오랜친구같이느꼈다. 김정중은 정가현이‘속된 부분이 조금도 없었다’고 했다. 두사람은향로와좋은술,명인의서화속에서책상­에문방사우를펼쳐놓고­필담을나누었다.두사람은취호재에서여­러번만나필담을나누고­의기투합했다. 김정중은 정가현을 자신의‘오랜지기’라고 했고, 정가현도 김정중을‘국내친구’‘하늘이 맺어 준 친구’라고 불렀다.김정중은 귀국 후 정가현에게 서신을 보내자신의 <연행일기(燕行日記)>의 서문을 요청했고정가현은흔쾌­히승낙했다.

만리길을마다하지않고­청나라의통치 중심지에 온 조선 사신들은 서적과 중화문화에 대한 강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그들은 의관을 단정히 하고 수행원 몇 명과 류리창을 찾아 고서를 탐방하고 음악을감상했으며때로­는서점주인과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특히 그들은 중국 문인들과 만나 향을 피우고 술을 건네며 문방사우를 펼쳐놓고 고풍스럽고 우아한 한자필담을나누며풍류­와문학을즐기며진한우­정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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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화가김홍도가그린­류리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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