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신과원명원(圓明園),그속에깃든인연들
글|왕멍( 王萌 ), 톈진<天津>사범대학교외국어학원한국어과강사
옹정(雍正)·건륭(乾隆)으부터 함풍(鹹豐) 10년(1860년)에 이르기까지 원명원은 줄곧 청나라 황제들이 베이징에서 행락(行樂)을 즐기던 주요 정원이자 정무를보는 장소였으며, 특히 제후국들의 사신을위해연회를베풀던곳이었다.건륭후기부터는 조선과 안남(安南, 베트남), 류큐(琉球, 오키나와) 등의 사신도 원명원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가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원명원의 흥망성쇠 과정을 지켜본 목격자들이기도했다.
원명원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중 옹정 4년 편에 등장한다. 이에 따르면 영조는 막 베이징에서귀국한 사은사 겸진하사(謝恩使兼進賀使)이요(李橈, 1684-?)에게 청의 상황에 대해물었다. 이후 건륭황제 연간에 이르러 조선 내부적으로 건륭의 통치에 대해 상당히긍정적인 평가였다. 건륭 후기, 매년 정월대보름을 전후로 청나라는 조선 사신들이원명원에서 열리는 대보름 기념행사에 참석할 수 있도록 윤허했고, 이는 점차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 이 밖에도 특별행사 때마다 원명원에서 열리는 중대 행사에 조선의사신들은빠지지않았다.조선의사신들은 원명원 인근의 민가와 여관, 혹은 사원에서 지낼 수 있었는데, 이로 인해 며칠이고 원명원에 출입할 수 있었고, 각종 기념행사에도참가할수있었다.조선의사신이가장먼저원명원에입장한것은건륭47년(1782년, 조선정조 6년) 정월초열흘날때의 일이다. 동지정사(冬至正使) 황인점과부사(副使) 홍수보가 임금의 명을 받들어원명원의연회에참석했다.이후조선사절단은 보통 음력 1월 13일 혹은 14일 오후부터 원명원 내부의 산고수장각(山高水長閣)에서가무와잡기공연을감상했고,밤에는등놀이와불놀이도즐겼다.음력1월 15 일 오전에는 가장 먼저 정대광명전(正大光明殿)에서 열리는 방생연(放生宴)에 참가했고, 오후에는 다시 장고수장각에서 공연을본 뒤 저녁에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등놀이와불놀이를감상했다.
원명원에서 연회가 벌어지는 동안 청나라황제는시를지은뒤대신들로하여금화답하게했다.한자에대한이해가깊었던조선의 사신들은 종종 청나라 대신들과 함께 시를 짓기도 했다. <연행록(燕行錄)>에는 원명원 내부 경관과 당시 연회 현장에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어 원명원 연구의소중한사료로꼽힌다.사신들이귀국해조선국왕에게보고할때원명원에대한부정적 언급이 사라진 것은 이때부터였다. 즉,사신들은 원명원 연회의 화려함에서 태평성대의청나라를느꼈던것이다.
그러나 가경(嘉慶) 17년(1812년, 조선순조 12년)부터 조선사신들의출장보고서에원명원에대한부정적평가가재등장한다. 동지서상관(冬至書狀官) 한용의는“가경제의사람됨이근검절약하고유흥과연회를좋아하지는 않으나, 원명원에서의등놀이를좋아하는것은마찬가지라많은 재물을 낭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비판이 나오게 된 주된 이유는 건륭 황제 때 성세(盛世) 속에 드러나지 않았던많은 사회적 폐단들이 가경황제 때 이르러점차 문제가 되기 시작했고, 조선 사신들은중국사회의사치풍조와관료들의부패, 국가재정 위기의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1차 아편전쟁 이후 청 왕조는 정월 대보름 등놀이를 취소했고, 원명원은 이때부터 쇠락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연행록>에기록되어 있다. 2차 아편전쟁 중에 중국을찾은 조선 뇌자관(賚咨官) 김경수(1818-?)는 귀국 후 남긴 견문록에서 <북경조약(北京條約)> 체결 전후 과정을 상세히 서술하며“영국·프랑스 연합군은 원명원을 불태우고 재물을 약탈했다. 전쟁은 당시 중국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기록했다. 이같은소식은조선내부에적지않은반향을일으켰다.
이후 조선 사신들은 더이상 원명원 연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원명원은이후로도 사신들의 문자 기록에 등장했다. 1869년 동지사를 따라 북경에 머물렀던 성인호는무참히훼손된원명원을보고“무고하게도절반이상이불타버렸다!흥성의정점에서쇠락하는것이하늘의 이치인가!”라며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