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na (Korean)

황청칭(黃澄清), 중국통신·인터넷발전에평생을바­치다

- 글|왕숴(王爍 ), 장진원(張勁文)

중국인터넷협회 사옥에서 황청칭 협회 부이사장을 만났다. 올해로 61세. 그 러나 청년 못지 않은 총기와 활력은 그의 나이를무색하게했다.우리와이야기를나 누며 그는 자주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40 년 경력의 노련함과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성격을느끼게하는웃음­소리였다. 황청칭의 인생은 꽤나 드라마틱하다. 1977년 가오카오(高考, 대학수학능력시험) 제도가 부활하면서 그는 가오카오를 통해 ‘지식청년은 농촌에 뿌리내린다’는 운명에 서 탈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도시에 남기 를 원했던 바람에 따라 베이징(北京) 소재 전문대학에서 위성통신을 공부하기로 결심 했다. 당시의 결정은 그의 인생 후반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가 중국 통신 및 인터넷사업발전에빠질­수없는기여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당시의 결심 때문 이었다. 40여 년을 한결같이 노력하며 황청칭 은 몇 번이나 자신만의 지식세계를 깨뜨리 고다시구축했다.그리고중국개혁개방의 물결 속에서 중국 통신사업의 선진화와 인 터넷의발전을추진했다.그간의업적을들 으며 놀라는 우리에게 황청칭은 담담하게 미소띤얼굴로 말했다.“통신도 좋고인터 넷도좋다.국가가발전하는과정에­는길을 까는 사람, 다리를 놓는 사람도 있고 차를 모는 사람, 화물을나르는사람도 있다. 그

중우리는길을깔고다리­를놓는사람이었 을뿐이다.” 1980년 5월 베이징 장거리통신학교를 졸업한 황청칭은 베이징 무선통신국(局)으 로 파견되었다가 이후 1989년 우전부(郵電 部) 전신총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새로 배 치된 일터에서 황청칭은 물밀듯이 밀려든 통신수요로눈코뜰새가 없었지만, 그안 에서 개혁개방의 거대한 발전잠재력을 엿 볼 수 있었다.“개혁개방이 막 시작되고 중국 경제가 막 첫 걸음을 뗀 때였다. 통 신 관련 수요가 특히 컸는데, 그때 돈으로 5000위안을 들여도 전화를 설치할 수 없 었던 상황이었다.(1990년 중국의 일인당 GDP는 1644위안이었다) 당시우전부전신 총국 부장 비서였던 나는 전화를 설치해줄 사람을 찾아 2000위안을 썼지만 결국 전화 를 놓지 못했다. 얼마 뒤‘다꺼다(大哥大, 휴대전화)’가 등장했을 때는 3만위안을 주 어도구할수가없었다.” 개인 수요뿐만 아니라 중국 각 성(省) 들에서도 통신발전에 대한 수요가 대단했 다. 개혁개방 초기, 중국은‘부유해지기 위 해서는 먼저 길을 깔아야 한다’고 강조했 다. 그 길이라는 게 사람들에게 익숙한 고 속도로나 철도를 가리키기도 했지만, 데이 터 통신용 전로 또한 빠질 수 없었다.“당 시 상하이(上海)까지 마이크로웨이브 통신 망을 깔기 위해서는 쉬저우(徐州)에서부터 전로 부설 작업을 해야 했다. 전로를 까는 것은 그 지역에 돈을 주는 것과 같아 경제 발전을 자극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성 (省)에서전로를깔고자우리­를찾았다.” 수요가 경제발전을 촉진하던 가운 데, 황청칭은 한 가지를 감지했다. 전신부 의 관리체제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1998년 정보산업부가 설립되면서 황청칭 은 정보산업부 전신관리국 서비스품질감 독처 처장을 맡게 됐다. 전신서비스 품질 을 관리감독 하는 것이 주요 임무로, 황청 칭은 연구조사를 통해 통신부처에 고객 서 비스 개념이 없음을 확인했다. 당시 통신 부처는 갖가지 명목으로 비용을 징수하고 있었고, 전화 설치를 신청해도 약속시간을 지키지 않았으며 유지보수 서비스 수준 또 한 매우 낮았다.“그때까지 통신부처는 당 과 정부·군부의 고급 간부를 위한 서비스 부처였다. 경제의 합리성이라는 개념도 몰 랐고, 국가를 위해서만 제공되는 일종의 고급서비스였다. 특히 이제 막 상품화한 전화 시장은 판매자 시장에 속했고, 사람 들은 통신부처에 전화 설치를 주문해야 했 다. 그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나는 꼭 관념 이 달라져야 하며, 대중을 위한 서비스 의 식이필요하다고생각했­다.” 황청칭은 곧 조직을 이끌고 통신부처 서비스품질 개선방안을 모색했다. 그의 지 휘 하에 정보산업부는 관리감독방법·고객 불만사항 처리방법을 마련했고, 통신기업 보고제도·서비스품질 공고제도·고객불만 제도를 제정함과 동시에 고객서비스센터를 설치했다. 이들 기준과 방법, 제도들은 현 재까지도사용되고있다. 황청칭은 그러나 통신부처 서비스 문 제가 아직도 존재하며 다만 문제의 종류가 달라졌다고지적한다.“지금의문제는주로 기업들이 자신의 경제효과만 고려해 그럴 싸한 결합상품을 내놓고 소비자들의 소비 를유도하고있다는점이­다.통신부처는새 로운 조치를 마련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 해야한다.”

“인터넷, 완벽하지는 않지만 성공은 성공”

황청칭과 그의 동료들이 통신분야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또 한번의 거대한 변혁이 소리 없이 다가와 있었다. 1994년 초 중미 양자간 과학기술공동회의 개막을 앞두고있던 때, 후치헝(胡 恒) 당시중국 과학원 부원장은 중국을 대표해 미국 국가 과학재단(NSF)에국제인터넷가입을신­청 해 최종 승인을 얻었고, 그 해 4월부터 국 제 인터넷에 정식으로 접속이 가능하게 되 었다.황청칭은당시의기억을­떠올리며흥 분감을 감추지 못함과 동시에 아쉬움도 드 러냈다. “통신업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돌발상황 대응과 백업이라는 관점 에서인터넷의존재를이­해하고있었다.그 러나당시에는인터넷에­대해잘알지못했 고,인터넷을그저과학연구­목적의것으로 만여겼다.우리는네트워크관리시­스템부 재가 매우 큰 문제라고 여기고 있었다. 또 한 비용계산시스템도 마련되기 전이었고 서비스 품질도 보장할 수 없던 때였다. 그 런 상황에서 네트워크가 국가의 인프라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우리는 인터 넷발전을추진하지않았­고,그래서중국과 학원이먼저중국의국제­인터넷편입을진 행한것이었다.” 중국이 국제 인터넷 네트워크에 편입 한 이후 황청칭이 염려했던 문제들이 잇따 라 발생했다. 특히 관리 및 통제가 불가능 하다는 문제가 가장 컸다. 인터넷은 사람 들간 교류와 정보전달을 편리하게 해주었 지만 동시에 많은 유해정보를 가져왔고 결 국 네트워크 보안이 의사일정에 포함되었 다. 2000년 국가 인터넷 응급센터가 조직 되면서 황청칭은 관련 업무 책임자로 배치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인터넷 관리가 결코 그 나라만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글로벌 인터넷 공동 관리에 참여 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는 게 그의 생각 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 중국 정 부는 국제적 인터넷 무정부주의로 인한 장 애에부딪혔다. “당시 아이칸(ICANN)이라는 인터넷 주소 관리기구가 있었다. 아이칸은 각국의 민간기구를 소집해 인터넷 주소 분배에 관 한토론을 진행했는데, 인터넷의‘무(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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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청칭중국인터넷협회­부이사장 사진/마겅핑(馬耕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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