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na (Korean)

조선연행사의자금성견­문기

글|위셴룽( 喻顯龍 ), 베이징대학교 국제관계학원 국제관계전공 박사생

-

중국 베이징(北京)의 고궁(故宮)은 명·청 양조(兩朝)의 황궁으로 600 여 년의 역사를 지녔다. 고대 중국에서 는 황제를 하늘의 자미성(紫微星)에 비유 했고, 황제가 사는 궁궐은 일반인의 출입 을 금지했기 때문에 구궁을‘자금성(紫禁 城)’이라고도 불렀다. 자금성은 규모가 방대하고 건물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으 며, 궁궐 장식이 아름답고 화려하며, 진 귀한 보물이 많이 소장돼 있다. 또한 세 상 사람들은 그 안에 담긴 역사와 문화적 깊이를 동경했다. 이런 매력 때문에 자금 성은 세계 각국 관광객의 사랑을 받고 있 으며, 베이징을 방문하는 외국 원수와 정 계인사들의 필수코스중하나가 됐다. 과거, 일반인은 이 신비하고 폐쇄된 자금성에 가까이 갈 수 없었고, 이곳으로 여행온 외국인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온 사람들은 자금성의 면모를 볼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바로 명·청 시대에 양국 사이를 오간 조선 연 행사다. 연행사 사람들이 자금성을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해 놓은 것이 진귀한 역사 문헌이 됐다. 자금성을 수리할 때 조선 연행사 김 만수가 영락제의 베이징 궁궐 수리 소식 을 조선에 전하면서 조선 임금에게 명나 라가 봉천전과 건청궁 등 건물을 짓고 있 다고 보고했다. 이후 자금성 관련 기록이 쏟아졌다. 궁궐의 물건과 황제의 모습을 기록한 사람도 있고, 건축 규모와 예법을 기록한 사람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자금 성의 화려함과 아름다움, 넓음이 그들에 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656년(순치 13 년) 조선 연행사 이요가 천안문(당시 승 천문<承天門>)의 건축 형태를 자세하게 기록하면서“금빛과 푸른빛이 휘황찬란 하다”고 감탄했다. 그는 자금성에서 제일 큰 건물인 태화전을“햇빛이 금빛과 푸른 빛을 비춰 눈부시게 아름답고, 구름이 굽 이굽이 이어지며, 향기가 코를 찌르고, 속세가 아닌 것 같다”고 기록했다. 1720 년(강희 59년) 같은 태화전을 두고 조선 연행사 이의현은“궁궐을 2층으로 지어 매우 웅장하다”고 썼다. 그는 태화전 앞 에 늘어선 백옥 돌난간의 조각에 특히 주 목하면서“조각이 매우 정교하다”고 감탄 했다. 이의현보다 8년 앞서 자금성을 방 문한 조선 연행사 김창업은 태화전 앞에 서 있는 철제 학과 청동솥(銅鼎)에 큰 관 심을 보였다. 그는“청동솥의 형태가 특 이하고 매우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1780 년(건륭 45년)은 청나라가 가장 풍요롭고 번영한 시기였다. 조선 사절 황인점은 건 륭 시기 자금성을 웅장하고 화려하며 아 름답다고 묘사하면서“황성 내 누각은 화 려함의 극치로 다 셀 수가 없다. 신하 등 의 말에 따르면 궁궐 안 자금성 사이에 태액지(太液池)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고 사원과 불탑이 가로로 뻗어있어 눈이 부 시다”라고 전했다. 근대 들어 1873년 조 선 고종 시기 연행사 일행을 따라 베이징 에 온 유명한 개화사상가인 강위는 자금 성에 들어가볼 기회가 있었다. 그는 자금 성의 규모와 궁궐의 기세에 감동해 <북유 일기(北遊日記)>에서“완전히 딴 세상이 다!”라며 감탄을금치 못했다. 조선 연행사들의 견문 기록은 우리 로 하여금 자금성의 역사를 다른 측면에 서 보게 했고, 문화 교류의 소중함을 새 삼 느끼게 만들었다. 과거 자금성은 군림 하는 황권을 상징하고 신비감과 거리감이 있어 소수의 행운아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 자금성은 새로운 시대로 진 입한 중국처럼 보다 개방적이고 포용적이 며 자신감있고 혁신적인 자세로 한국 친 구를 포함한 세계 각국의 친구들을 열정 적으로 맞이하고 있다.

 ??  ??
 ??  ??

Newspapers in Korean

Newspapers from Ch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