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JU Business Daily

내년은임시정부 100년-아주경제연중기획

- 이상국아주T&P대표

#중국장군을감동시킨조­선여성의발언

중국 운남육군항공학교에 여성 조종사가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주인공은 바로 조선의여학생이며 조국의 독립운동을 하다가 중국으로망명해입학했­다는얘기도나돌았다.

입학 당시, 운남성 독군(督軍,지방군 사령관) 당계요(唐繼堯) 장군과 대면한 이 낯선 조선여자가 서원(誓願)했던 말은 인구에 회자됐다. “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비행기를 몰고 일본으로날아가폭격하­고자비행학교를지원하­는 것입니다.” 장군은 권기옥의 이 당찬 말에입학을 주선해줬을까. 일제 하의 고통을 함께겪고 있는 중국인으로서 깊은 공명과 동병상련을느꼈을것임­엔틀림없다.

일본의 귀에 이 말이 들어가지 않을 리 없었다. 비록입학을지원하는 조선 식민지 출신한 소녀의 야심일 뿐이었지만 일본제국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만한한 마디였다. 경찰에선비상이 걸렸다. 그들은 민씨 성을 가진 조선인청년 하나를 가만히 포섭해 권기옥이란 비행사를암살하라는지­령을 내린다.

#암살자를유인해사살하­다

그런데, 자신을 죽이려고 다가오는 민씨에대한 정보를 누군가가 권기옥에게 먼저 알려줬다. 기옥은 몰래 빌린 총을 가슴에 품고, 긴히전할말이있다는청­년을데리고학교인근의 공동묘지로 유인한다. 이때 동기생인 이영무와 장지일을 멀찍이서 뒤따르게 했다. 긴박한순간이었다.

묘지 한쪽에 앉아 얘기를 꺼낼 듯 하다가칼을 꺼내 공격하는 청년을 밀치고 기옥은 서슴없이 총을 쏘았다. 만약을 대비해 감시하고있던 이영무와 장지일이 뛰어왔을 때 청년을이미숨을거둔 뒤였다.

이 사건이 있은 뒤, 일본 영사관은 권기옥사살령을 내렸다. 어디서든 이 여자를 만나면죽이라는 지시였다. 그는 일본 경찰의 접근이불가능한 지역인, 학교 내에서 근신했다. 시시각각 죽음이 서성거리는 학교에서 그는 삶의구원같은 ‘수업’에 매달렸다. 1925년 2월 28일,도무지 올 것 같지 않던 그날이 왔다. 운남육군항공학교 제1기 졸업생 권기옥. 그의 가슴엔 ‘윙’ 배지가달렸다. #풍옥상의부대에서날아­오르다

그해 5월 그는 상해 임시정부로 돌아왔다.비행기를 몰 자격은 생겼으나, 임정에선 그에게 그런 것을 사줄만한 재력이 없었다. 기옥의가슴은 답답했다. 비행학교를 졸업하면 무엇하나. 비행기가없는 것을.

이듬해인 1926년 봄, 임정의 인사가 그에게풍옥상의 항공대를 소개했다. 풍옥상은 북경에 있는 군벌이었다. 비교적 조선에 호의적인그가 운영하는 비행부대에는 조선인 서왈보가 동로군 항공대장으로 있었다. 항공학교 졸업자인 권기옥은 자격과 실력을 인정받아 단숨에항공대의부비행­원으로임명되었다.

1926년 5월21일자 동아일보와 1927년 8월28일자 중외일보는 권기옥에 대한 기사를 쓴다. ‘중국 창공을 정복한 꽃같은 여류용사, 조선의 붕익(鵬翼,위대한 날개)’이란 표현은그때나왔다. 한국 최초의 비행사로 기록된 안창남과함께거명되고­있는점이눈에 띈다.

1927년경 중국 국민혁명군의 손정방 군벌이 항공기를 접수해 상해에서 공군을 모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권기옥은 달려갔다.그는중국공군의비행원­이 된다.

# 7000시간의비행기­록을지닌여성대위

초기엔 계급체계가 정리되어 있지 않아, 중령에까지 올랐는데 이후 공군 개편 때 대위로정해졌다. 권기옥은, 중국의 여성 군인을 비행기에 태우고 대륙을 일주하며 혁명의 기세를돋우는 역할도 했다. 총 7000시간의 비행기록을지닌비행사­였다.

1928년 5월 기옥은 남경에서 돌연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공산당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경찰이 그를 조선으로 보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마침 중국인 지인이 활약해 일본 영사관에서 취조를 받은 뒤 풀려났다. 그해, 권기옥에겐 삶의 반려자도 생겼다. 풍옥상 부대의준장급참모였던­5살연상의 이상정(18961977)이었다. 32세 남자와 27세 여자의 독립투쟁 중의 결혼이었다. 이상정은 기옥과 동갑내기였던 민족 저항시인 이상화(1901-1943)의형이기도 했다.

지금은남의땅빼앗긴들­에도봄은오는가나는온­몸에햇살을받고

푸른하늘푸른들이맞붙­은곳으로가르마같은논­길을따라꿈속을가듯걸­어만간다

입술을다문하늘아들아

내맘에는나혼자온것같­지를않구나-이상화의시‘빼앗긴들에도봄은오는­가’중에서

#독립투쟁중의결혼

1926년 월간 ‘개벽’에 발표한 이 시를, 2년뒤에 형수인 권기옥도 읊조렸을까. 그는 가만히 ‘빼앗긴 하늘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바꿔 불렀을까.

1931년 만주를 점령한 일본은 이듬해 상해공격에 나섰다. 권기옥은 출격하여 지상의 일본군을 향해 기총소사(機銃掃射)를 한다. 항공학교입학때의그맹­세를제대로실천한셈이­다. 이 전쟁이 확전되면 될수록 기옥에겐 희망이 보였다.

중국군이 일본군을 섬멸하면 자연히 조선도 독립을 할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러나 현실 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장개석총통은 만주를 일본 땅인 것을 확인해주는 대신 전쟁을종료하는협정을­맺고 만다.

#마침내일본본토상공위­에서폭격을할기회가

1935년 특별한기회가 왔다. 당시항공위원회 부위원장이던 송미령(장개석의 후처로 손문의 처제) 여사가권기옥에게 ‘선전비행’을 제안한다. 당시중국청년들의공군­입대를장려 하기위해여성비행사의­비행시범을이벤트로보­여주자는 것이었다. 코스는 상해-북경-화북-화남-동남아를 경유해 일본까지 비행하는 길이었다.

기옥은 마침내 일본 본토 상공 위로 날아가 폭격을 할 수 있는 찬스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이 선전비행은, 북경 대학생 시위가 격화되면서 정국이 불안해짐에 따라 취소된다.

 ??  ?? 권기옥의일대기를다룬­연극 ‘비상’의 한 장면.
권기옥의일대기를다룬­연극 ‘비상’의 한 장면.
 ??  ?? (위 사진)운남항공학교교정과 항공기. 권기옥(가운데)과 남편 이상정(오른쪽) 그리고시인 이상화(왼쪽), 1937년 남경에서 촬영.
(위 사진)운남항공학교교정과 항공기. 권기옥(가운데)과 남편 이상정(오른쪽) 그리고시인 이상화(왼쪽), 1937년 남경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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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당계요장군 기념은화.
당계요장군 기념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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