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JU Business Daily

피로일으킨권력,흙으로눕다…광릉‘大權無常’

사후53년…단종비정순왕후광릉인­근에묻혀계유정난은‘숙부의난’으로불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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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정난(癸酉靖難) 당시에 사전에 정보가 새나가 수양대군이 망설이자 손수갑옷을입혀남편의­거사를격려한 여장부였다. 선조때이조판서등을지­낸이기의문집 ‘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수양대군의부인을간택­하기 위해 감찰상궁이 정희왕후 집을 찾아간 이야기가 나온다. 원래 궁궐에서 마음에 둔 후보자는 정희왕후의 언니였다. 그런데 정희왕후가어머니 이씨 뒤에 숨어서 어른들 이야기를 듣다가 감찰상궁의 눈에 띄었다. 언니보다정희왕후의자­태가더비범하다고대궐­에알려지면서그녀는언­니대신수양대군의부인­으로간택됐다.

정희왕후는둘째아들예­종이재위 1년 2개월만에별세하자일­찍죽은 첫째 아들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지산군(성종)을 왕위에 앉혔다. 12살 임금 성종 뒤에 발을 치고 조선 최초로 7년 수렴청정을 한 여인이다.

수양대군(세조)은 계유정난의피바람을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수양대군은 무사들을 데리고 좌의정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 그를 죽였다. 55년 전 이방원(태종)이 부하 몇명을 데리고가 정도전을 죽인 것에서본뜬 듯하다. 이후단종의명을빙자해­영의정부사 황보인, 이조판서 민신, 병조판서조극관,의정부좌찬성이양등을­궁궐로들어오라고해입­궁하는족족 살해했다. 이날의금부도사와삼군­진무를시켜안평대군과­그의아들이우직을강화­로압송했다.

수양대군은궁정쿠데타­직후스스로영의정부사­와병조판서이조판서를 겸하면서 전권을 틀어쥐었다. 실록은 승자의 관점에서 기술돼 있다. 정난(靖難)은 나라가 처한 병란이나 위태로운 재난을 평정했다는뜻이다. 오종록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는 ‘세조의 즉위과정과 정치문화의 변동’이라는 논문에서 계유정난이 아니라 ‘숙부의 난’이라고 부르는것이적절하다고­논평했다.계유정난을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대립으로보는시각도 있다. 김종서황보인등 고명대신(顧命大臣)의 권력이막강해지면서왕­권을위협해세조의쿠데­타를불렀다는것이다.

노산군을 상왕으로 올리고 세조가 왕이 된 뒤에도 피바람이 그치지않았다. 세조는성삼문등사육신­의단종복위모의가드러­나자단종을노산군으로 강봉(降封)하고 영월로 유배 보냈다. 단종의 모친 현덕왕후를 문종의 합장릉에서 끌어냈다.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고 3일 만에 죽어 안산에 묻혔다가 문종이 승하한 뒤 합장됐다. 그러나 현덕왕후의 친정 식구들이 사육신의 모의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자 세조는 현덕왕후의 신분을 서인으로 강봉하고 문종 능에서 파내 평민의 예로 개장했다.

세조는 남양주 풍양궁에 자주 묵으며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을 했다는 기사가 성종실록에 나온다. 세조는 이때부터 광릉을 자신의 묘역으로 정하고 전나무를 많이 심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국립수목원이 뿌리찾기를 하면서 역사문헌을 뒤졌지만 그런 기록을 찾을 수없었다. 세조가 승하하자 조정에서는 광주(廣州)와 양주의광릉을 놓고논의하다광릉으로­모셨다는것이다.

남양주 광릉, 강원도 월정사, 부안내소사는한국의 3대 전나무숲길로 꼽힌다. 다자란전나무는높이가 20~40m나 된다. 높은언덕에조성된 광릉의 능상에 오르면 전나무 소나무를 비롯한 상록의 침엽수 숲이천군만마처럼도열­한모습을내려다볼수 있다.

강원도 오대산의 월정사와 상원사는 세조와 깊은 인연이 있다. 상원<대권무상>사에는 세조가 쓴 중창권선문(국보 제292호)이 남아 있다. 세조 12년(1466년)에 조성된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221호)의 복장유물에서는피고름­얼룩이묻은 어의(御衣)가 나왔다. 세조는종기를치료하기­위해오대산주변의온천­과불당을자주 찾았다. 세조는피고름이묻은어­의를문수동자상속에넣­으며악성종기가깨끗이­낫기를기원했을것이다.

세조가 조카와 신하들을 살생하고 권력을 찬탈하는 반인륜의 악행을 저질러 악성종기가 생겼다는 민중설화가 있지만 문종 세조 형제가모두종기로 고생했다. 문종은세종밑에서 29년 동안세자로있다가보위­에오른지 2년만에종기가악화해­승하했다.조선왕조실록과승정원­일기에따르면조선의역­대왕 27명 가운데 12명이 종기를 앓았다. 위생이나쁘고의학이발­달하지못했던시대의이­야기다.

월정사 전나무 숲길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돼 천년의 숲이라고 불린다. 월정사 일주문부터 금강문까지 1㎞의 전나무 숲길에는 30~40m 높이의 전나무 1700여 그루가 서있다. 임금이 되어서도 월정사 상원사를찾았던세조에­게전나무숲길은강한인­상을주었을 것이다.

세조가 월정사 전나무 씨앗을 가져다가 광릉에 심었다는 이야기가전해져오지만­광릉 일대에서가장오래된전­나무는수령이 180년 정도다. 이해주 국립수목원 산림박물관장은 “광릉 능참봉들이 기록한 광릉지(光陵誌)에 따르면 정조 때 전나무를 많이 심었다. 세조가 전나무를심은기록은찾­을수없었다”고 말했다.

단종(1441~1457년)이 왕이됐을때나이는 11살이었다. 단종의할머니인소헌왕­후와모친현덕왕후가모­두세상을떠나수렴청정­할사람도없었다. 성종도 12살에 왕이됐지만 ‘세조의 장자방’이라 불리던한명회가 장인이었고, 7년 동안 정희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을 해 안착할 수 있었다. 한명회는정희왕후와뜻­이맞아두딸을예종비인 장순왕후, 성종비인 공혜왕후로 만들고 왕의 장인(국구·國舅)으로서 영의정을 두 번지냈다.

세조는 14년간 재위하면서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을 단행하고, 밖으로중국에대해자주­성을높이는데힘을 기울였다. 호적호패법강화로인구­조사를통해중앙집권적­통치체제를정비했다. 변방방어체제를정비하­고명나라와연합작전으­로두만강유역의여진족­을 몰아냈다. 조선왕조의기본법전을­만들고자 ‘경국대전’ 편찬을주도했다.

세조가 권력을 장악하고 즉위하는 과정은 잔인무도했다. 그러나 그가 국왕으로서 남긴 업적은 사학계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이상백은 ‘한국사’<근세전기편>에서 ‘세조의 즉위 후 치적은 다대하여 태종세종을 거쳐 확립된 국가의 기초가 세조에 의해 더욱 공고하게 되었다’고 서술했다.

광릉의능참봉들이산림­을가꾸고지키어한국의­대표적인국립수목원의 기반을 닦은 것도 세조의 사후(死後) 치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澤>

자료지원 남양주시청·협찬

도움말 남양주시립박물관김형­섭학예사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세조의즉위과정과

정치문화의변동,오종록,인문과학연구제3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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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언덕에자리한세조­릉에서는나무의바다같­은광릉숲이 내려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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