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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안반목·홍콩시위격화…무너지는일국양제원칙

덩샤오핑,흑묘백묘론정치적응용­해첫주창시진핑집권후­中사상·제도주입시도노골화정­치적괴리감·경제종속우려…거부감확산

- 베이징(중국)=이재호특파원qing­qi@

1981년 9월 중국의 10대 개국 원수이자 당시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을 맡고 있던 예젠잉(섭검영·葉劍英)은 대만 문제에 대한담화를발표했다.

그는 “통일이 실현되면 대만을 특별행정구로 삼고 고도의 자치권을부여하겠다”며대만국민당정부에협­상을제의했다.

이듬해인 1982년 1월 11일 중국 최고지도자인 덩샤오핑(鄧小平)은“예 동지의 제안은 실질적으로 ‘하나의 국가, 두개의 체제(一個國家, 兩種制度)’를 의미한다”며 “국가 통일이라는 전제 하에 대륙은 사회주의,대만은자본주의를실행­할수 있다”고공식확인했다.

중국이통일을추구하며­내세우는대원칙 ‘일국양제(一國兩制)’가 처음거론된순간이다.

중국은 이 원칙을 앞세워 1997년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되찾았고1999년에­는 포르투갈령이던마카오­를다시품에 안았다.

하지만 중국이 고도 성장기를 구가하며 미국과 더불어 주요 2개국(G2) 지위에 올라서고 정치·경제 체제에 대한 자신감이 높아지면서 일국양제를거추장스러­워하는모습이지속적으­로포착되고있다.

특히 과거 어느 때보다 권위주의적인 시진핑(習近平) 체제로 접어든뒤일국양제원칙­은점차누더기가되고 있다. 중국의사상과제도를주­입하려는시도가노골적­으로이뤄지고있는 탓이다.

홍콩에서는일국양제의­덫에서 벗어나려는 원심력이갈수록강해지­고 있고, 아직편입되지 않은대만에서도일국양­제에대한반감이높아지­는양상이다.

홍콩의반중시위는 100일 넘게지속 중이며, 내년초대선을앞둔대만­의경우독립주의자인 차이잉원(蔡英文) 현총통의재선가능성이­높다는분석이나온다.

중국과 무역전쟁을 치르고 있는 미국은 홍콩과 대만을 지렛대 삼아대중압박을강화하­는 모양새다. 덩샤오핑이제시한통일­마스터플랜이흔들리고 있다.

◆일국양제,흑묘백묘의정치적변형

중국은 1949년 건국후 1950년 한국전쟁 참전, 1950~1960년대 대약진운동 실패에 따른경제 악화, 1966~1976년 문화대혁명 등의 풍파를겪으며통일문제­에신경을쓸겨를이없었­다.

덩샤오핑이 집권하고 1978년부터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대만과의대화 재개, 홍콩·마카오흡수통합관련논­의가활발해졌다.

‘하나의 중국’이라는 틀만 유지할 수 있다면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개의치 않겠다는 일국양제 원칙은 개혁·개방 정책의 슬로건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을 정치적으로응용한것이­다.

1979년 1월 1일 전인대 상무위원회는 ‘대만 동포들에게 고함’이라는성명을통해양안­간군사적대치종식과통­일추진을위한협상을제­안했다.

1982년부터 영국과홍콩반환협상을­시작한중국은 1983년 홍콩문제해결을위한 12개 조항의정책방침을발표­했다.

특별행정구 설치, 고도의 자치권·입법권·사법권 부여, 현행 법률 및경제·사회제도 유지, 사유재산 인정 등이 골자인데 사실상 일국양제의얼개가확정­된 셈이다.

중국은영국과 무려 22차례에 달하는협상을벌인끝에 1984년 9월18일 ‘중국과 영국 간 홍콩 문제에 관한 공동성명’을 채택하는 데 성공했다.

덩샤오핑의 뒤를 이은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은 1992년 “일국양제로 조국 통일을 촉진하자”며 대만에 협상을 재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중국과 대만은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그에 대한 해석은 각자의판단에맡기는 ‘92 컨센서스’에 합의했다.

중국은 일국양제 가운데 ‘하나의 국가(一國)’에 방점을 찍는다. 대만과홍콩은각각청일­전쟁과아편전쟁에패배­하면서일본과영국에빼­앗겼던 영토다. 이를 되찾아야 치욕스러운 역사를 씻고 민족적 자긍심을회복할수있다­고 여긴다.

1997년 7월 1일 홍콩에대한주권행사를­재개한날중국공산당기­관지인인민일보는 “100년의 산전수전을겪은홍콩의­귀환으로이땅의진정한­주인이누구인지확인됐­다”고 강조했다.

대만이 독립을 주장할 때마다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도 같은맥락이다.

중국은 1993년 발간한 통일백서에서 “대만 문제는 중국의 내정으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적 합의로 분단된 독일과 북한 문제와는 다르다”며 “양안 간협의를통해하나의중­국이라는틀안에서합리­적인해법을찾을수 있다”고 명시했다.

◆대만·홍콩에는

중국의 기대와 달리 일국양제 원칙은 대만과 홍콩 등에서 환영받지못했다. 첫계기는 1989년 6월터진천안문사태였­다.

젊은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를 탱크를 앞세워 유혈 진압하는 장면을 목도한 홍콩인들은 중국 공산당의 일국양제 약속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당시 수십만 명의 홍콩 시민들이 베이징 한복판에서 벌어진 참극에분노하며중국의­민주화열기를지지하는­집회를 열었다.

대만도 마찬가지였다. 공산당이 통치하는 중국에 흡수 통일된다면대만의민주­주의체제를더이상보전­하기어려울것이라는사­실을절감했다.

이후의 상황도 우려했던 대로 흘러갔다. 고도의 자치권을 약속했던것과 달리 홍콩 정부를 이끄는 행정장관은 초대 둥젠화(董建華)부터 5대캐리 람(林鄭月娥)까지 모두친중파인사가당선­됐다.

안맞는옷인가

홍콩의 줄기찬 요구에 중국은 2017년부터 행정장관 직선제 실시를공언했지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집권한 직후인 2014년 이 결정을번복했다.

중국중앙정부가선호하­는후보 2~3명 중한명을선거로뽑는 ‘무늬만 직선제’로 선회한 것이다. 홍콩 시민들은 2014년 9월부터 79일간 행정장관 완전 직선제를 외치며 민주화 시위를 벌였다. 잘알려진 ‘우산혁명’이다.

대만에서도 ‘하나의 중국’ 원칙에부정적이던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이 1996년 재선에도전하자중국은­당선을막기위해대만을­향해미사일을발사하는­등군사적압박에나섰다.

중국의입맛에맞지않는­정치인이득세할때면어­김없이 군사적·경제적도발이 이어졌다. 중국공산당의일당독재­체제와대만및홍콩의민­주주의체제는공존이불­가능하다는공감대가확­산하고 있다.

◆중국의부상·불안한경제가본질

정치적 괴리감 외에 경제적 종속 가능성도 일국양제에 거부감을 갖게된요인으로꼽힌다.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된중국의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은 13조6000억 달러로대만의 23배, 홍콩의 37배에 달한다.

미·중 무역전쟁의영향으로올­해중국의경제성장률이 6%대 초반에그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지만 대만은 2%대에 불과하고 홍콩은 마이너스성장을걱정해­야할 처지다.

홍콩은아시아의 금융·무역 허브, 대만은첨단제품제조기­지로 2000년대까지 호황을 누렸지만 그 과정에서 중국에 대한 의존도도 지속적으로높아졌다.

차이나 머니의 융단 폭격이 시작되면서 금융·부동산·관광업은 중국인들의손에의해조­종되고 있다.

지난 2014년 11월 시주석과 마잉주(馬英九) 대만총통의 만남, 이른바 시마후이(習馬會)에 당시대만에서만난젊은 대학생들은 “시마후이가밥먹여주냐”며시큰둥한반응을보였­다.

분단 66년 만에양안정상이 회동한다고 떠들썩했지만, 장기불황에지치고 위세를 더해 가는 차이나 파워에 예민해진 대만인들은 오히려불안감을드러냈­다.

100일 넘게 이어지고 있는 홍콩의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 반대시위도 팍팍한 삶에 지친 젊은이들이 주도하고 있다. 밀려드는 중국인들이 일자리를 빼앗고 부동산 가격을 높이고 홍콩만의 고유한 문화를훼손하고있다는­피해의식이큰 세대다.

우산혁명에 이어 송환법반대 시위까지 이끌며홍콩내반중아이­콘이 된 조슈아 웡(黃之鋒)은 1996년생으로 홍콩 주권이 중국에 반환되기한해전에 태어났다.

조슈아웡의사례에서확­인할수있듯이홍콩을되­찾은뒤한세대가흐르는­동안중국의화학적결합­시도는효과를거두지 못했다.

덩샤오핑은 중국의 일부가 된 홍콩에서 일국양제를 50년간 유지하겠다고공언했다. 그이후에도일국양제원­칙은유효할 것인가.

<6회부터는온라인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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