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저항을가볍게여긴대통령의끝
1979년 부마항쟁과박정희를생각함1979년전세계헤게모니싸움억눌린정치·경제적불만들불관용의정치와기회의박탈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그러니까 1979년 7월 1일, 카터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을 마치고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남북 교차승인에관한 의견을 물었고, 박 대통령은 이에 동의하였다고 한다. 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 철수나 긴급조치 9호해제를둘러싸고설전을벌인것과는 달리, 이문제에서는두정상의의견이일치했던것이다.
1979년은 미·중 수교와 이란혁명이라는 두 가지세계사적 사건으로 시작된 해였다. 당시 한·미 간에는 안보문제와 인권문제를 둘러싸고 팽팽한 긴장이흐르고있었다.
카터 대통령은 미·중 수교에 따른 후속조치로 주한미군 철수와 남·북·미 3자 회담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이란혁명과 같은 사태가 한국에서 반복되지않도록정치자유화를강력히주문하고있었다.
당시한국사회에서는강력한검열때문에밖으로표출되지는 않았지만, 유신체제에대한반감이상당했다. 재야로불렸던급진민주주의자들은유신헌법폐지와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였고, 야당의 온건 민주주의자들은 긴급조치 9호와 양심수들의 석방을요구하였는데, 카터대통령과미국의 고위인사들도기회있을때마다인권개선을요구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끝까지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지 않았다. 주지하다시피, 한·미 정상회담이 끝난후 넉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박 대통령이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9월에 접어 들어 대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고, 10월 초에 김영삼 신민당총재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하자, 유신체제에대한 잠재적인 불만은 집단적인 저항으로 변하기시작하였다.그것이바로부마민주항쟁이다.
부산과 마산에서 차례로 일어난 학생들의 저항은 시민들의 합세로 대규모 시위로 변했고,박대통령은이를계엄령과위수령으로막았다.
현장을 직접 목격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당시의 상황을 폭풍전야와 같다고 느꼈다. 미국의 정보보고서도항쟁이 정치적불만에경제적박탈감이더해지고있다고기록하고있었다.
만약 박 대통령이 그때 계엄령 대신 긴급조치 해제를 선택했더라면 어땠을까? 그의 불행은 자신의자존심에너무집착했기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1979년은 한국전쟁으로 시작된 미·중적대가화해와협력으로전환되는시점이었다. 그는 이런 시대적 변화를 충분히 읽지 못했고, 대중들의불만과저항을가볍게생각했다.
그결과는 ‘대통령의 불행’이었다. 그의후임 대통령들도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을 제외하면,이런불행을반복했고오늘날까지도지속되고 있다.
오래전에 그레고리 헨더슨은 한국정치를 소용돌이의 정치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이보다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역동적 발전이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동성 뒤에 잠재하고 있는하나의 위험, 즉 관용의 문
제를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
다. 반복되는대통령의불행은독선과함께상대방에대한관용이거의없었기때문이다.
물론 한국의 정치를 규정하는 구조적 요인에는미·중 관계가 자리한다. 적대적 국면에서 화해협력의 국면을 지나 치열한 경쟁의 국면에서 접어든 미·중 관계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는 나라가 한국이다.정치군사적으로 미국에, 경제적으로 중국에 의존하는구조가불가능해지고있다.
중대한변화의기로에서한국의시민사회는머리를 맞대고 이런 난국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토론해야 하는데, 배타적 불관용의 정치는 이런 기회를국민들로부터빼앗아가고있다.
40년 만에 부마민주항쟁이 국가기념일이 되었다. 10·26과 1980년의 소용돌이 때문에 잊혔던 부마민주항쟁의기억이제자리를찾고있어서다행이다. 다만과거에대한기억이집착으로전락하지않았으면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