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JU Business Daily

우연아닌필연이었다,분단의벽무너진까닭은

-

1989년 11월 9일. 30년 전 오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장벽이 붕괴되던 날 갑자기 뉴스를보고그 사실을 알았다. 실감할 수 없었다. 장벽이 무너진 다음 날, 내가 살았던 브레멘 시청 앞 광장으로 나갔다. 학위를 마치고 잠시 몸담았던 독일회사의 동료들과 함께 갔다. 그들이 분단의나라에서온나에­게 묻는다. 장벽의붕괴를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얼떨결에 “난 너희들이 부럽다”고 했다. 그 부러움은 아직까지도 계속된다. 독일에서 돌아와 ‘통일연구원’이라는 곳에서내 인생의 중요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처음 연구원을 들어갔을 당시나 지금이나 남북관계는별반차이가­없는것 같다. 독일이분단되었을당시­에도나는마음만먹으면­언제든지동베를린이나­동독지역을갈수 있었으니까, 그런것과비교하면진전­된것은하나도없는것 같다.

독일 통일을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독일은동독이 갑자기 붕괴되어 통일되었다”고. 그래서 “남북한의 경우에도 통일이 갑자기찾아올수있기때­문에준비를 해야” 한단다. 정말 그럴까?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거의 모두는 북한의 붕괴를 필연적으로다가올우리­의미래로보고있는것 같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이라고할 수 있는 북한이 어떻게 붕괴될 것 같은지, 왜 붕괴될 수밖에 없을 것인지에대해서는답이 없다.

독일의 통일은 동독의붕괴가아닌동독­이원해서한 것이다. 동독의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역사에 우연’이라는 것이 있을까. 적어도 독일 통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흔히, 아무도예상하지 못했기에 그리고 너무도 급진적으로 이루어졌기에 많은 사람들은 독일 통일을 ‘우연의 산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 통일의뒤엔 필연이 자리 잡고 있다. 동서독 통일에 결정적인 인물이 있다. 구소련의고르바초프대­통령이바로 그다. 1980년대 말동유럽국가에대한개­혁과개방을주도했던 인물이다. ‘페레스토로이카’, ‘글라스노스트’는 동유럽 국가의 개혁과 개방을 상징했던 단어였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한 나라의장래와체제는그­나라국민들만이정할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동유럽주민들을­거리로 나서게 만들었다. 또한동독의시민혁명으­로 이어졌다. 라이프치히니콜라이 교회로부터 촛불행진이 일어났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들은 어떻게할것인지서로이­야기하며행진을 했다. 이행진이동독전지역에­들불처럼 일어났다. 한때 동베를린에는 백만 명에 달하는 인파가 운집하기도 했다. 그들의 요구는 단순했다. “여행의 자유를 달라”는 것이었다. 동유럽 국가가 아닌 “서독과 서유럽 국가로도 자유롭게 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그들의 요구였다. 그러면서그들은 “우리는 폭도가아니라민중”이라고 외쳤다. 자유여행에 대한 동독주민의 요구가 최고조로 높아지자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부는 국제기자회견을 한다. 동독의 선전상인귄터샤포스키­가나와국외여행제한을­풀겠다는 선언을 한다.그는 한 가지 실수를 했다. 여행제한의 해제가 언제부터 유효하느냐는기자의질­문에그는지금당장인것­같다고 했다. 기자회견을듣고있던동­독주민들이 바로 분단의 상징이었던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내달렸다.봇물 터지듯 밀려오는 사람들을 동독의 국경수비대나 경찰들은 막을도리가 없었다. 그것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게 한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넘어왔다가다시돌아가­기도했다.

장벽이 무너져 서독에자유롭게 오갈 수있는상황이되자동독­주민들은통일을외치기 시작한다. “우리는 한민족이다”라는 피켓을 들었다.통일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독은 통일 10개항을 기반으로 하는 조약공동체를 만들어 천천히 통일할 것을 생각했다. 동독주민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서독의 마르크가 우리에게 오지 않으면 우리가서독으로가겠다”고 했다. 서독정부는받아들일수­밖에 없었다. 많은동독주민이 서독으로 오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채 8개월이지나지않아서­독의마르크를동서독이­같이사용하는 화폐통합을 단행했다. 그뒤 4개월 후 1990년 10월 3일 동서독 지역전체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을 뽑고 총리를 선출한다. 독일의 정치적 통일이완성된 순간이었다. 화폐통합부터한것은동­독주민을동독지역에머­무르게하기위한 조치였다. 동독의화폐를서독의화­폐와 1:1로 바꿔줄테니동독지역에­머물러달라는조치였다.

동독주민들은 왜 서독과 즉각적인 통일을 요구했을까? 그것은 다름아닌 통일을 하면 서독처럼 잘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그렇다면 그런 믿음은 어디서 생겨났을까? 분단 이후 부단하게 이루어진 양독간의 길고 긴밀한 교류·협력 때문이었다. 서독과의 교류협력을통해 얻었던 친서독적인 경험이 통일을 하면 서독과 같이 자유롭고 잘살수있다는확신으로­변해있었던 것이다. 그래서그들은한사코서­독과통일하려고 했다. 그것도동독이서독속으­로쏙빨려들어가는통일­을받아들였던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시장경­제체제로의 평화통일. 이것이 동독주민이 시민혁명을 통해 쟁취한 통일의 실체다. 교류와 협력은 실로 다양했다. 일반인과 학생들의 상호방문이 이루어졌고, 도시간자매결연이 이루어졌다. 각종 종교대회와 스포츠 교류가 이루어지기도했다. 동독지역에 건설된 교통 인프라는 동서독주민이 같이 사용했다.심지어 65세가 넘는동독주민들은얼마­든지서독으로올수 있었다. 이산가족의상봉은물론­이고,동독의정치범들도서독­정부가인도적차원에서­비용을 지불하고 데려오기까지 했다. 동독주민들은 TV를 통해서독을잘알수 있었다. 서독 TV 광고를보면서잘사는서­독을 실감했고,자유로운 토론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민주화된 서독 사회를 느낄 수있었다. 이와같은 교류협력이 끊임없이 이루어졌기에 결정적인순간이왔을 때 동독주민들은 한결같이 서독과 통일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교류협력이 서독을 마음속에 동경하며 살게 했다. 서독은 통일을 하려고시도한 적이 없었다. 다만 교류협력을 꾸준히한 것밖에 없었다. 이것이동독주민의뇌리­에서독을자연스럽게갈­망하게만들었던 것이다. 교류협력이가져다준선­물이 ‘통일’이었던 것이다.

우리가원하는통일은어­떤 형태인가. 우리헌법제4조에대한­민국은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평화통일을지향한다고­명시되어 있다. 동서독이바로이런통일­을 했다. 이보다더좋은사례가있­을수 있을까? 우리의통일도바로그렇­게해야하는것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교류협력을 통해 북한 주민의 마음을 사야한다. 통일은 사람이하는 것이다. 동서독의 통일이 동독의 붕괴에 의해 이루어진 통일이라고 한다면그 붕괴를동독주민스스로­가원했기에 통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통일에 어

떤우연이있는것일까? <(사)남북물류포럼대표>

 ??  ?? 1989년 11월11일 시위자들이 무너뜨린 베를린 장벽사이로동독의경비­병들이 보인다. [AP‧연합뉴스]
1989년 11월11일 시위자들이 무너뜨린 베를린 장벽사이로동독의경비­병들이 보인다. [AP‧연합뉴스]
 ??  ??

Newspapers in Korean

Newspapers from Korea, Republ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