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가야금’이충주‘신라금’된사연
코로나19는 한가위풍속도까지바꾸었다.민족대이동이라고 불리는 혈연·지연의 견고한 문화마저바뀔수있다는가능성을보여주었다.수천년동안추석이라는 이름 아래미풍양속으로 당연히감수했던명절스트레스를줄일수있다는사회적합의를경험한까닭이다.신라때경주 낭산(狼山)에서활동했던가난한 음악가 백결(百結·한 벌옷을 백번기워입었다는 뜻) 선생도 명절이엄청괴로웠을 것이다. 끼니를 해결할 쌀조차도 제대로없는 살림살이인데, 명절이라고 따로 떡을 만든다는 것이가당키나했겠는가.가장은상심한부인을위해거문고(琴)로방아찧는소리를연주하며정성껏 위로했다. 별다른경제적출혈없이생색을낼수있었다.부인이그소리만으로만족했는지는알수없지만‘방아타령’이라는 명곡은영원히남게 된다. 명절가난이라는위기가또다른창작의기회를제공한 것이다.
고향친구들과 모여왁자지끌하게회포도 풀 수없는 역병이창궐하는 추석에는 혼자 방에서갖가지음원을 통해거문고 연주소리를 들으면서‘지음(知音)’으로 우정을대치하는방법도있겠다.제자백가서〈열자·列子〉에나오는두친구가 그랬다. 백아(伯牙)가 생각을높은산에두고서거문고를연주하면 종자기(鍾子期)는 듣고서“태산과 같음이여!”라는추임새를 넣었고, 물을염두에두고거문고를타면“황하와 양자강 같을시고!”라고 하며무릎장단을 보탰다. 이처럼백아가 생각하는바를 종자기는반드시알아들었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줄을 끊고(絶絃) 다시는 연주하지않았다고 한다.이후 ‘지음’과 ‘백아절현’은 우정을상징하는문자로바뀌었다. 만약지금둘이다시만나거문고를연주하고추임새를넣고자한다면“종자기는 반드시마스크를 착용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서친절한안내문자가올 것이다.
엄숙한 조선의선비들도 음악에대한 이해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교양이기도 했다. 경북 예천 남야(南野)종택에는 자명금(自鳴琴·나라와 집안에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스스로 울림)이라고 불리는 거문고가 가보로 전해왔다고 한다. 박정시(朴廷蓍·1601~1672)는 벼슬에서물러날때책한권과이거문고 한 개만 챙겨서 귀향했다. 청렴결백했던 그도거문고는포기할수 없었다.어찌보면오백년전의부분명품족이누린유일한 사치였던 것이다. 서재에거문고를 두고서독서하다가 쉬는 틈을 이용하여연주를 하곤 했다. 혹사당한 눈은 쉬게하고대신놀고있던귀를열고서손가락을마디마디움직이는이완을 통해긴장감을 해소하는 나름의휴식법이라하겠다.
경북청도화양 탁영(濯纓)종택에는 탁영금(보물제957호)이 전해온다. 김일손(1464~1498)이 1490년제작한 것으로, 국내에서현존하는가장오래된거문고라고 하겠다. 당시의원재료는 오동나무로 제작된, 이미 100년 넘은 낡은 문짝이었다. 문을 새로교체하면서버려지는것을얻어와거문고를만들었다. 문비금(門扉琴·문짝거문고)이라 이름을 붙이고는 “거문고는 내마음을 단속하는 것이다. 걸어두고소중히여기는것은긴소리때문만이아니로다”라는의미까지부여한 글을 남겼다. 오동나무판대기가 문(門)의역할을마치니다시거문고의몸체로바뀐것이다.
절집에도 거문고는 빠지지않았다. 충남 예산 수덕사에전해오는, 만공(滿空·1871~1946)선사가 소장했던 거문고는 고종임금의아들인의친왕이준 선물이라고 한다. 바탕에‘공민왕 금(琴)’이라는 글씨가 새겨져있긴했으나 지방문화재지정으로 만족해야 했다. 추정컨대전문가들로부터진짜 고려금(高麗琴)으로 인정받진못한 모양이다. 고려진품이라면 당연히 국보감이다. 하지만 현대소설가의영감을 자극하면서장편소설 탄생의실마리를 제공했다. 최인호(1945~2013) 작가의‘길없는 길’은 이거문고의비밀에 대한 상상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이처럼거문고는 가사를 짓고 소설을 만드는 마르지않는문학적샘물역할도마다하지않았다.
경자년(2020년)의 추석풍습만 변하는것이아니라, 이미오래전에가야금이름도 바뀌었다. 우륵(于勒)의 고향인 대가야국 도읍지였던 경북 고령에서는 가야금이라고 불렀지만 가야가 신라에병합된이후 그의주 활동무대가 된 충북 충주 탄금대로옮겨가면서신라금이 된다. ‘신라금’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나라(奈良)에 소재한 동대사(東大寺·도다이지)정창원(正倉院·쇼쇼인)에몇점이보관되어있다고한다.현재가장오래된가야금인셈이다.
지금 가야금과 거문고는 일목요연한 도표를 만들어 서로 차이점을 열거하면서 분명하게 경계를두고나누고있지만 한자사전의‘금(琴)’자(字)는 ‘거문고 금’자다. 두악기역시세월이흐르면서자기개량을 게을리하지않았고 지역과 성별에따라 악기에대한 선호도가 달라졌지만, 예전에는크게구별하거나 나누지도않았던 모양이다. ‘강남에서는 귤,강북에서는 탱자’라고 한 것처럼지역과 사람에따른 자연스런변화가 뒤따랐을 뿐이다. 어쨌거나 모든 것은 바뀐다는그 사실하나만 바뀌지않을뿐모든 것은 변해가기마련이라는 것도 ‘금(琴)’자가알려주고있다.
가능한 한 이동금지를 권고한 추석연휴인지라지인이두고간국악시평집을읽으면서시간을보냈다. 덤으로오가는길에탄금대와가얏고마을을찾았다. 이게책한 권이주는 힘이다. 가얏고마을입구의넓은 공터에 진열된, 어림짐작으로 몇 백개는될법한전시용오동나무판은또다른 볼거리다. 남한강절벽위의탄금대표지석앞에서유장하게흐르는강물을바라보며소리없는소리를들었다.아~그렇지(유레카)! 서산(西山)대사로 불리는 청허휴정(淸虛休靜·1520~1604)선사도 거문고를 좋아하여‘청허가(淸虛歌)’를 남기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