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에서호국의숨소리를듣다
남한산성최고명소는 수어장대(守禦將臺)다. 1751년 광주유수(廣州留守)이기진(李箕鎭)이영조의명에따라 2층으로 증축했다. 본래는 서장대(西將臺)라고 했다. 인근 매바위(鷹巖)에는 ‘수어서대(守御西臺)’라는 각자(刻字)가 남아있다. ‘서장대’가 ‘수어장대’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준다. 오른쪽아래마당에는 ‘무망루(無忘樓)’가 있다. 1989년 수어장대2층에있던현판을이자리로옮겼다.인조의삼전도치욕과효종의북벌을잊지말자는의미로영조가썼다고 한다. ‘능력이뒷받침되지않는북벌계획일지라도잊지는말자’던무망루곁에는대한민국건국초기정치인이심었다는기념식수가 있다. ‘점심은 평양에서먹고저녁은신의주에서먹는다’는 그허세는북문인 ‘전승문(全勝門)’ 이름과 맞닿는다. 병자호란때군사 300명이 대기하다가청군의기습을받고전멸한 곳이다. ‘이일을기려패하지말고이기자’라는의미로붙였다고 한다. 쩝!하긴정치를하려면대내용발언도필요한법이라고해두자.
발길을붙들어매는것은 청량당(淸凉堂)이다. 주봉인청량산에서비롯된이름이다. 청량당근처에는당주가머무는집이있었다. 안방건넛방그리고 부엌이있는단출한 세칸 초가집이었다고 한다. 그때의향나무와 전나무는지금도그자리를지키고있다.육이오때소실된것을이후청량당만 복원했다. 영험있는 산신기도처로 알려져지역주민과 토착종교인들에게인기있는유명굿당이기도하다.
전쟁을대비하면서남한산성을쌓는국가적큰일을할때는알게모르게억울한 희생자도나오기마련이다. 당사자인이회(李晦)는 총융사(摠戎使군사 총책임자) 이서(李曙1580~1637)의 부하였다고 한다. 동남쪽 방향의성을 쌓으라는 명령을 받고 건설현장에투입되었으나 진도가 지지부진했다. 공사비를 모두 지출하고도 부족한지라 사재를 털었고 그것도 모자라는지라부인송씨와유씨가 삼남(三南·충청호남 영남)지방으로 화주(化主·모금)를 떠났다. 결국공금횡령이란죄목을둘러쓰고이자리에서극형에 처해졌다. 모금을 마치고 돌아오던부인들도 그 소식을 듣고서송파나루근처 쌀섬여울(米石灘) 강물에몸을 던졌다. 뒷날 재조사를 하게되었고험한지형과꼼꼼한기초공사때문에공기(工期)를 채우지못한것이알려지면서누명도 벗게 되었다. 두 부인의원혼을 달래기위해한강변에재각(齋閣)을 세웠고이회도수어장대자리에사당을 세웠다. 세월이흐르면서한강변재각은없어지고 청량각에 합사(合祀)되어오늘에이르고있다는줄거리다.
실제로 남한산성을 완성한 사람은 벽암각성(碧巖覺性1575~1660)대사가지휘한 의승군이다.병자호란이일어나기직전에3년만에완공했다.그공로로 산성으로 피난 온인조에게‘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시호를받았다.
조선왕조실록 현종10년(1669) 6월 20일(신사)에는 당시상황을유추해볼수있는기록이남아있다.
“광주부윤(廣州府尹) 심지명(沈之溟)이임금께아뢰었다. 병자년(1636년인조14년)에(남한산성쌓을 때)승군의힘이가장큰도움이되었습니다....신(臣)이 지난해(1668) 북문과서문을건립할때일반백성(民丁)이3일동안한일이승군이하루한일에도미치지못했습니다. 대체로승군들은부역할때죽을힘을다해일하기때문입니다.”
부역때문에마지못해끌려나온일반백성들보다 승군들의 울력(일) 속도가 3배나 빨랐다는 이야기다. 결국 ‘이회사건’ 이후에모든일을승군이떠맡게되었을 것이다. 성을 완성한 후 남은 공사대금을 국고에반납까지했다. 1846년 홍경모(洪敬謨1774~1851)가 편집한『하남지(河南志)』권9 성사(城史)에는 이를뒷받침하는기록이남아있다. 이회이름은아예보이지도않는다.
“영의정이원익(李元翼)과 연평부원군 이귀(李貴)가 남한산성수축을청하였다.총융사이서(李曙)에게명하였다.이서는고승인각성(覺性)과 응성(應性)등을불러지역을나누어일을 맡겼다.”
본래산성안에는사찰이두개밖에없었다. 추가로7개를 새로건립했다. 동문근처의개원사(開元寺)는본영사찰이었고나머지8개사찰은팔도에서차출된승병들이출신지별숙식처로이용했다.나라의어려움앞에서조선팔도에서달려와서하나가 된모범사례이기도 하다. 이후 270년 동안수도한양을지키는호국사찰역할을겸했다.
남한산성안에는많은사당이있다. 청량당에는 이회(李晦), 숭열전에는이서(李曙)를 모셨다. 이서는 남한산성뿐만 아니라 각처의산성을 수리했고뒷날병조판서를역임했다.병자호란와중에과로로인하여남한산성에서순직하였다. 청계당(聽溪堂)에는 벽암대사를봉안하고매년제사를지냈다. 세사람모두남한산성관련공로자들이다. 현재청계당은없어지고영정은청량당으로 옮겨졌다.일부에서는 청계당과 청량당이처음부터같은집이었다고한다.하지만현재정면에이회를봉안하고좌우로벽암대사와이회의두부인을모신걸로미루어보건대같은집이라고보기에는억측이지나친것 같다. 구전기록이가질수밖에없는 한계이니그러려니하고알아들으면될일이다.
무신도(巫神圖)에가까운 청량당, 영정이아니라 제대로된벽암대사의진영에호은유기(好隱有璣1707~1785)는 이렇게찬(讚)을 부쳤다.호랑이를그리되포효하는모습까지미칠수있는가?터럭뿐이로다.사람을그리되그속마음까지드러낼수있겠는가?얼굴뿐이로다.벽암존자의영정에서그명성과 덕행을드러낼수 있는가? 의대(衣帶 왕이내린가사)뿐이로다.
나의 찬사(讚辭)가 하늘과 땅을 감화시킨그모습을다드러낼수 있는가? 붓의행로가막힐뿐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