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텃밭꽃길놔두고黨쇄신승부수…청정정치판근간만들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열정’을 가슴에늘 되새겼다. 그열정이란 모범생기질이기도 하고, 무엇이든지한번한다면하는그런기질이다.
그는 학창 시절 어머니가 장사하시는 남대문시장의서너평짜리수예품가게에가보곤 했다.나일론제품에서뿜어져나오는유해물질때문에눈이따가워살 수 없었다. 내뿜는 독소를 매일들이마시며일하시는어머니를생각하니가슴이저며왔다. 그는그때‘집안을 일으켜세워야겠다’고다짐했다.이를위해선사법고시에붙는것외에는 방법이없었다고 생각했다. 대학생이된청년은곧바로실행에옮겼다.결과는합격이었다.
청년은이제어엿한변호사가 됐다. 곧바로개업을 했다. 생계를 위한 길이 트인 것이다. 변호사 개업 1년도 안 됐을 때 ‘일조권’ 사건 하나를의뢰받았다.
어느 날 변호사 사무실에 한두 명도 아니고여러 명이 떼 지어 우르르 몰려왔다. 뭐가 그리억울했나 싶었다. 알고보니일조권피해를호소하는 의뢰인들이었다. 나중에알았지만 이들은이쪽저쪽 안 찾아 본 변호사 사무실이 없었다.당시만해도이런사건은맡아주질않았다.지금에야 일조권이보편적권리가 됐지만 그때만 해도실체가 없었다. 변호사들은이게아니어도돈벌일이 많았다. 그러니이사건이 ‘퇴짜’를 맞은건어쩌면당연했다.후일이사건은대한민국최초의일조권판례를만들었다.
하지만 초짜 변호사는 모든 사건에열정적이었다. ‘잘하면되겠다’고 판단했다.그러나국내에는일조권에대한판례도학설도 전무했다. 그래서일본사례를 뒤져봤다.일본에는많은판례가있었다. 대개법이란 독일에서일본을통해우리나라로 들어온다.일본에판례가있으면우리도판례를 만들 수 있다. 따라서승소가능성은매우높다고판단했다.
변호사는우여곡절끝에일본판례를번역해판사에게갖다줬다. 1·2·3심에서 승소했다.변호사는이때일본어에능통했고환경
에도눈을뜨기시작했다.
일조권소송은몇년이라는시간이걸렸다. 소송 상대인 해당 건설업체는 국내굴지 대기업이었다. 이회사 변호사 또한 쟁쟁했다. 대법관 출신변호사였다.이를상대로초짜변호사가승소를 이끌었다. 변호사는이과정에서환경단체사람들을자주만날수 있었다. 당시변호사는 ‘공해추방연합(공추련)’이라는 시민단체를 찾아갔다. 무슨 자료라도 얻을 수 있지않을까 해서였다. 이때시민단체가 이렇게열악한 환경에처해있는 줄 처음 알았다. 광화문에있는 허름한 다락방이었다. 불쌍해서변호사가 오히려도와줘야 했다. 변호사는이렇게시민단체속에빠져들었다. 변호사는 갈 때마다 밥도 사주고 하면서이들과 친해져어느새시민단체운동가가 돼있었다. 무료 환경 법률 상담도 해줬다. 지금으로말하면재능기부자였다.
당시시민단체회원들 월급은일반 시민월급대비4분의1정도에불과했다. ‘이렇게어렵게살면서도 사회에 헌신하면서 사는구나’ 생각하니애처로웠다. 한창나이에사명감하나로돈도안벌고열정을불사르고있었다.그는감화를받았다. 같이환경운동을 하기로 했다. 이렇게몇 년시간이 흐르면서변호사는 공추련 상담실장도되고 일조권 사건에서도 어느새 승소했다. 대한민국일조권첫판례를 얻어냈다. 초짜변호사가말이다. 어느새 ‘스타 변호사’가 돼 있었다. 그럴수록 시민단체활동을 더열심히 했다. 더많은열정을 갖고 했다. 급기야 공추련은 환경운동연합으로 바뀌고 그는 여기서법률상담실장과 중앙위원회위원을맡게됐다.
변호사는 환경연합에서 주인의식을 갖고 일을 했다. 시민운동가가 돼 버렸다. 환경에 관한법을만들고 제도를바꾸기위해환경부공무원을 만나야 했고 때론 국회의원도 만나야 했다.하지만 변호사로선 넘기 힘든 벽이었다. 국회의원과 공무원들은 고압적이고 무성의하기만 했다. 해준다고 해놓고 해주지도 않고, ‘개무시’ 당하기일쑤였다. 울분도 쌓였다. 하지만 변호사는이제스타가 아니던가. 방송에출연해프로그램진행도 맡고, CF 주인공도 되고 연예인보다 더잘나가는셀럽변호사아닌가.
이 무렵 변호사는 여야 양당에서 정계 진출제안을 받는다. 먼저제안한쪽은여당이었다. 새해아침청와대에서전화한통이걸려왔다.김대중 대통령이었다. 정계진출 제안을슬며시받았으나변호사는속내를보이지않았다.
이어야당인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한테서도전화가 왔다. “한나라당은 당신 같은 인재가 필요하다”고 했다. 변호사의 원래 꿈은 정치인이아닌 대학교수였다. 모교에서 대학교수를 하고싶었다. 당시시민단체에몸담고 있던변호사는기나긴숙고끝에이를수락했다.
법·제도 하나를 바꾸기위해얼마나 많은 설움을 당했던가. 국회의원이되면환경운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는 환경연 활동가들권유도 적극 받아들였다. 변호사 신분으로 국회문턱을 넘나들기가얼마나 힘겨웠던가. 이총재의입당 제안을받아 정치인이됐다. 변호사는쉬운여당의길을놔두고야당을 택했다. 어려운사람을 돕고, 더노력하는 사람에게더많은 기회와 인센티브가 주어지는 나라를 만들자는 데공감했기때문이다.어쨌든그날 화창했다.하늘도파랗게높았다.온 세상이초록으로물들어있었다. 국회의사당에핀꽃이이렇게아름다운줄은 국회의원 4년임기마지막날처음알았다.
짧다면짧았던 시간이었다. 17대 총선불출마를 선언하니초선의원은마음이너무나홀가분했다. 이제서야 국회앞마당에핀 꽃이 처음 그의눈에들어온 것이다. 지난 4년간 그는의정활동에파묻혀살았기때문이다.
이기간그는개혁적이고파격적이기만했다.그는 정치자금법을 개정했다. 일명 ‘오세훈법’이다. 또 ‘수도권 대기환경에관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두 법은 그의 인생에서 결정체요, 활짝핀꽃이었다.
초선 의원은 4년 내내 개혁적행보를 걸었다.원희룡, 남경필,정병국등소장파의원들과‘미래를 위한 청년연대’를 결성했다. 여의도에선 이들을 가리켜 ‘미래연대 5인방’이라고 불렀다. 미래연대는당내정치개혁과당쇄신을 위한 모임이다. 여기서그는공동대표를 맡고 모임의총대를멨다.
이어 2002년 “제왕적 총재를 폐지하자”고 주장했다. 17대 대통령선거를 불과 6개월 남겨놓은 시점이었다. 당내 파장이 클 수밖에 없었다.초선 의원은 막무가내였다. 공천권을 쥐고 있는당 중진들에게까지도 거침없이들이댔으니말이다. 그의지역구는 ‘강남(을)’이다. 이곳은보수진영텃밭이다. 꽃길이다. 가만히누워있기만해도감이저절로 떨어진다. 그렇지만 그는 개의치않았다. ‘이 한몸던져당을 개혁하고 쇄신해야 한다’는 주의였다.
이렇게되자 당내에선 ‘젊은 x이 어쩌구 저쩌구, 싸가지없는x이어쩌구 저쩌구’하는비난일색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개혁하지 못한 이 정당은 그해대선에서끝내패배하고 말았다.대선2연패를당한 것이다.
이듬해 그는 다시 심기일전했다. 그의개혁칼날은 5·6공 세력을 향했다. 그는“한나라당이수구적이미지에서벗어나야 한다.그러려면 5·6공 세력이퇴진해야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고삐를더옥죄었다. “5.6공 세력, 용퇴하라.그러면이초선의원도같이물러나겠다”였다.
그가 17대총선불출마라는배수진까지쳤다.이 불출마 약속은 그대로 지켰다. 불출마 선언후일명‘오세훈법’은 국회를 통과했다.옥동자는이렇게 탄생했다. 기업의정치자금 후원금지및후원금대폭축소가 골자였다.다시말해‘가난한정치초년생도소신껏정치할수있게 하자’였다.이는그가어렸을때부터가졌던신념과 맞아떨어진다. ‘수도권 대기환경개선에관한 특별법’도못지않게 중요했다. 이특별법도 국회를 통과했다. 이특별법시행일은 2006년 7월 1일. 이날은그가 서울시장에당선돼 임기를 시작하는날이었다. 즉, 자신이직접만든 특별법을 최초로 실시하는광역단체장이됐다.그는이때문에‘미세먼지는내운명’이라고믿고있다.
사람들은그를 정치가, 행정가로알고있지만그의핏속에는환경운동가DNA가 흐르고있다.이특별법은수도서울뿐아니라나라전체를맑고 깨끗하게 만드는 데 근간이 되고 있다. 서울녹지축 구축, 한강르네상스, 자전거보급, 천연가스·전기차보급등이대표적이다.
그는 지금도 “온실가스 해결 없이 미래 도시발전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서울을 비롯해전국에서하고 있는 대기오염방지관련정책은초선의원이만든 특별법에서기인하고 있다.그속에는 대기질 개선과 관련된 모든 시스템이갖춰져있다.
초짜변호사가대기업상대‘승소’스타변호사반열이회창제안에정치입문…초선때부터개혁과파격“제왕적총재폐지”당중진등기득권상대소신행보환경개선법통과…직접만든특별법시행첫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