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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살다‘숙적’이란덕본네타냐후무력­충돌에지지율회복‘기사회생’

하마스전이후2배늘어­난37%야당대표와격차5%p로줄어

- 최은솔기자scott­choi15@

중동위기‘확전 여부’에대한결정권을 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총리(75·사진)의 결정에모두가 주목하고 있다. 지난 6개월간 수많은 민간 사망자가 나오고도 전쟁을 끝내지못해‘실각’ 위기에놓였던그는최근­이란과의무력충돌을동­아줄삼아 지지율을 회복 중이다. 그의정치경력은 늘 위기 속에서도 다시연장되는끈질긴생­명력을보여왔다.

네타냐후 총리는 도합 16년 동안 집권한 이스라엘 최장수 총리다. 1949년 이스라엘텔아비브에서­태어난 그는 중·고등학생 시절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보냈다. 1967년 고등학교 졸업뒤이스라엘로 돌아와 이스라엘방위군(IDF)에 입대해 5년간여러전투에 투입됐다. 전역후 그는미국으로다시건너­가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업중이던 1976년 팔레스타인테러리스트­에게납치된인질을구출­하기위해‘엔테베 작전’에 참여한 형요나단네타냐후가테­러리스트의공격에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형을 끔찍이 아꼈던 네타냐후 총리는 아직도죽은 형과 국가의중대사는물론개­인사를 상의한다고 2016년 뉴욕타임스(NYT) 인터뷰 도중 말하기도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공부를 마친 뒤1978년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그는국제 테러를 연구하는 ‘반테러연구소’를 설립해 이스라엘 정계와 처음관계를 맺었다. 이때맺은 인연을 토대로 네타냐후 총리는 1984년부터198­8년까지 유엔 주재 이스라엘 대표로 재임하면서국제사회에­서이스라엘의얼굴로 나섰다. 이기간에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아버지와친해져 트럼프 전 대통령과 밀월 관계를과시하기도했다.

1991년 외무부 차관에발탁된 그는 걸프전 당시이스라엘 정부 대변인으로 나서전 세계에얼굴을 알렸다. 이후 1993년 당시 보수 야당 리쿠드의 당대표로 뽑힌 네타냐후 총리는 본격적으로 정치적 꿈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에 1996년 조기총선으로 치른 선거에서 그는 최초의직선제로뽑힌총­리이자최연소총리로부­임했다.

승승장구할 것만 같던 그의정치생애는 이후 부침을 반복했다. 1996년첫부임후네­타냐후는1999년 선거에서 야당에 참패해 정계 은퇴를선언했다. 하지만 그는 이후 정계로복귀하며 외무부 장관과 재무부 장관을역임했다. 2선에머물러있던네타­냐후는 2005년 리쿠드당 지도부로 복귀했다. 2009년에는 다른 우파정당과 연립정부를 수립해 두 번째로 총리를 맡게 된다. 2021년까지 무사히 연임에 성공했지만 2021년 코로나19 방역 실패와 팔레스타인 갈등 문제에 대한 책임론으로 정권을야당에넘겨줘야 했다.

잠시 물러났던 네타냐후 총리는또다시 2022년 선거에서 우파 연합을 이끌어승리한 뒤총리로 복귀했다. 그는 국민들에게강력한안보 체계확립을 약속했으나 2023년 10월이슬람 무장 정파 하마스의 공격으로 수백명이인질로 붙잡혀가는 사건이 발생해 대내외에서 대규모 ‘퇴진’ 압박을 받았다. 그는 하마스 섬멸이라는 목표하에 가자 지구 침공을 감행했으나 현재까지도 전쟁을끝내지도,인질을귀환시키지도못­해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최근에도 이스라엘 내부에서 퇴진 시위가 이어지고, 심지어유명 석학 유발 하라리예루살렘 히브리대 교수도“복수를 멈추라”고공개비판하기도 했다.

이처럼수세에몰렸던네­타냐후는최근 이란의 공격으로 전환점을 맞게 됐다. NYT는 20일(현지시간) 네타냐후총리의지지율­이상승했다고전했다. 보도에따르면 네타냐후 총리의지지율은 37%를 기록해지난해10월 하마스와 전쟁을 시작한 직후보다 2배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이에 정계 라이벌인 베니 간츠 국가통합당 대표와의 차이도 5%포인트로 줄었다. NYT는 네타냐후의지지율 반등은 이란과 본토 공격을 주고받는 불안정한 상황의효과를본것이라­며이란과직접공격을주­고받는와중에 국민들은 이란에 대한 강경한 메시지를 주도해 온 네타냐후를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매체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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