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JU Business Daily

스케일작아지는한국외­교,‘담대한구상’이필요하다

- 이백순법무법인율촌고­문필자주요이력

유명한 역사학자 토인비는 ‘인류의 역사는도전에대한 응전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한나라의외교정책도 국내정치적요인만으로­결정되는것이아니고국­제환경변화에대응하는 과정에서 도출된다. 이런도전과응전의도식­은강대국이나약소국이­아니라우리와같은중강­국에게더욱의미있게적­용된다.강대국은자신의국익을­국제사회에일방적으로­투사할수있어정세변화­에무관심하고약소국은­아예대응수단이없으므­로 정세변화에순응할수밖­에없다. 그러나 중강국들은 국제정세변화에영향을 많이받는 동시에이런변화를제어­할수있는수단도있으니­이런응전의자세를가지­는것이당연하다.

건국이후 역대우리정부들은 급격한 외부환경의변화를 경험했고, 국가적위기상황도몇차­례경험하였다.당시각정부는이런정세­에 대응하여 새로운 정책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대응하면서어려운 국면을 뚫고 나온 전력이있다.

우리외교사에서예를 찾자면한국전발발시동­맹외교, 월남전참전 외교, 닉슨독트린과미군철수 대응외교, 일본과 안보경협자금 협상, 그리고냉전체제붕괴무­렵의새물결을탄북방외­교등이이러한 도전-응전 사례에부합되는경우라­할수있다.

이당시우리의대응을 보면국제정세변화에 따른 발빠른 대응과 현명한 선택을 하였고때로는 상대국의허를 찌르는 조치들을 선제적으로 취하는 능동적외교를 보여준 경우도 있었다. 구체적사례를들자면이­승만 정부당시이승만 라인을 전격선포하고 일본 어선의조업을 금지하여우리수산업이­익을 지킨일이있다. 그리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는부정적이면서­휴전부터하려는미국을­압박하기위하여반공포­로를 석방한 이승만 정부의조치도 벼랑끝 외교의원조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박정희정부 시절에유럽의대륙붕 분쟁에 대한 국제해양법 재판의 결과가 우리에게유리하게 난 것을 간파하고 우리가 7광구를일방적으로 설정한 적이 있다. 허를 찔린일본이우리에게매­달리다시피하여우리가 7광구를공동개발구역­으로변경해준사실도있­다.

또한 한·미동맹이 우리안보의 근간이지만이전 정부들은 한·미간 국익의편차가 존재할때는 우리국익을 지키기위하여미국과 강경한 대치,협상을마다하지않은경­우도꽤존재한다. 이승만 정부당시미국은 우리가일본과화해하고­국교를수립하도록압력­을가했으나우리는 예비회담만 열어놓고 공전시키며이를회피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때도 미국의 방위공약에 대한 의구심이 들자 독자적인 방산체제를 구축하고 핵무기개발을 시도한 적도있어미국의미움을­샀다.

우리의 동맹, 우방국들과의 교섭에 있어서도 우리의 실리를 챙기기위하여의외의 패를꺼내어우리경제발­전을뒷받침한외교전도­전개하였다.월남전파병구상도이승­만대통령이먼저미국에­제의한 것이다. 이를바탕으로박정희대­통령이케네디대통령을 처음 만날 때미국을 떠본다. 그후존슨대통령이월남­참전을 결정하면서 우리에게 파병을 부탁하자 양국은 협상에 들어간다. 4차례에 걸친 월남파병을 하면서각 단계마다 우리는 우리국익을최대한 챙기는 교섭을 진행하였고 이때 벌어들인외화는 경제발전의마중물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군의장비현대화가 이루어지고 우리기업들의해외진출­도처음이루어지게된다.전두환 정부 때는 우리는일본이우리덕분­에안보에무임승차한다­는논리를내세워일본이­우리에게안보경협자금 100억 달러를 제공해야한다고압박하­여40억달러를받아낸­전력도있다.

또한 우리 외교지평을 넓히기 위하여 국제정세변화를 재빨리간파하고이흐름­에편승하여새로운 이니셔티브나 선언 또는 정책등을 제시하며창의적외교를 전개한 사례도 다수 존재한다. 미국이중국과 수교하고 소련과데탕트 조짐을 보이자 박정희 정부는 강경한반공정책을 포기하고 6·23 선언을 통하여공산권 국가들에게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리고남북한 간에도 7·4 공동성명을 통하여 교류,협력을 시작한다. 노태우 정부 때도 우리가 먼저북한에제안하여남­북 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선언도만­들어내었다.

대담한 정책 전환인 노태우 정부의북방외교는 우리 외교의 금단지역이었던 구 공산권국가들과 국교를 맺기위하여우리가 먼저주도권을 가지고 움직였다. 미국은 처음에는 반대하였으나 우리는 미국을 설득하며구 공산권 46개국과 수교를 하여남북 외교경쟁에서우리우위­를 확고히 보여주었다. 그리고이북방외교는 모스크바와 북경을 거쳐평양의문을 열려던 통일정책이자 연해주와 시베리아로우리의경제­영토를확장시키려던‘통큰 외교’구상을담고 있었다. 이러한 방대한 스케일과 담대한 추진력을 가진외교구상은 그이후에나온적이없다.

과거 우리의 국력은 지금과 비교하면 현저히약하였고 국내외적인 제약요인도 많이있었으나 우리는 결집된 국론을 바탕으로 과감한정책변환을시도­한적이많았다.이로써외교안보정책의­창의성이돋보이고그스­케일이컸으며한국의결­기를 보여주는 성과를 이루었다. 즉우리가먼저제안을하­고타국이우리의뜻에따­라오도록하는일도 있었다. 그러나지금 우리국력은 몇십배성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담대한 외교는 보이지않고 상대국의요구를 우리가 주로 수용하는 수동적인외교가일상화­되어버렸다.

지금 국제질서 대변환의 시대를 맞아 우리외교도창의성,결단성그리고보다더큰­스케일의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우리외교안보­정책은과거답습적이고­기존프레임에얽매인행­태를보여주어외교적상­상력의빈곤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우리의외교력은 시대가 흘러갈수록 더축소되는 듯한용두사미형모습을 보인다. 즉 학점으로 비유하자면못살던때 A학점받던학생이집이­부유해지자 C학점으로 성적이 떨어지는 현상이벌어지고있다.

이러한 사태는언제부터인가 우리가주체적으로 국익을 판단하는 능력을 잃어가면서시작되었다. 주변국의선제적조치에­항상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이 언제부터인가 우리외교에고착되었다.그리고우리국익을지키­기보다는 주변국과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외교의목적이되는 전도현상이발생하고 있다.그래서일부 인사들은 상대국에게항상 고맙다고만하면외교가­잘되는것이아닌가하는­그릇된인식까지하고있­다.

둘째는국론이분열되고­외교가국내정치의포로­가 됨으로써 새로운 이니셔티브를 취하기가 어려운 구조가 형성되었다. 담대한 구상을발표하려면국내­여론의지지부터확보해­야하는데이런노력도할­수없는당파적구조가생­겨나 담대한 구상이있더라도 발목부터잡으니될일이­없다.

셋째는 담대한 구상을 하는 전략적마인드가우리정­부 내에서점차 실종된것도 원인이다. 외교·안보 부서는 현업처리에매몰되고 대통령실의 상의하달식의사결정구­조 속에큰그림그리는능력­을어느덧상실해버렸다.

넷째북한 핵위협이점증하면서우­리 외교·안보역량을 북한의위협대응에모두 소진해버려다른 문제에대해숙고할 여력이부족한것도한원­인으로볼수있다.

이런 문제점을 잘 인지하고 이를 극복하기위한 노력을 의식적으로 전개할 필요가 있다.이번에외교부의한반도­교섭본부를축소하고이 조직을 가칭 ‘전략기획본부’에 흡수시키려는 노력이 외교 회생의 실마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대통령실도 소수의 참모진 의견에의존하지말고 더넓은 전문가들의의견을수렴­하여창의적외교정책을­개발하는노력을기울여­야 한다. 우리외교가 담대한 외교적상상력과 결기를 회복할 때우리의활로를 찾을수있을 것이다. ‘어떤 외교정책도 소수에의해입안되고 다수의마음을 얻지못한 경우에는실패한다’는 외교의대가 키신저의 말을 되새길때이다.

역대정부,국가적위기상황능동적­대응…‘북방외교’등대담한정책전환국제­질서대변환의시대,국력성장에도프레임에­갇혀상상력빈곤드러내­주체적국익판단능력잃­고주변국눈치만…창의적외교정책개발노­력을

▷서울대 독문학과 ▷주미얀마 대사 ▷국회의장외교특임대사▷주호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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