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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령(張九齡)- <강남유단귤(江南有丹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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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ㅣ임명신( 한국 )

江南有丹橘,經冬猶綠林.豈伊地氣暖,自有歲寒心.可以薦嘉客,奈何阻重深.運命唯所遇,循環不可尋.徒言樹桃李,此木豈無陰. 강남유단귤경동유록림­기이지기난자유세한심­가이천가객내하저중심­운명유소우순환불가심­도언수도리차목기무음 강남에붉은귤이 있나니, 겨울에도푸르름 여전하네.어디 꼭 따뜻한 환경 때문이랴, 스스로 추위를 이기는 마음 덕분이지.귀한손님에게권할만하­나,어찌그리장애물이많은­가!운명은그저만나지는것,그돌고돎을알아낼순없­으리.그저복숭아자두만심으­라지만,귤나무라고그늘이없겠­는가?

오언고시(五言古詩) <강남유단귤>은 장구령(AD 678740)의 감우(感遇)12수 가운데 제7수다. 문득 떠오르거나 느낀 바를 사물에 빗대어 우의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감우시의매력이자 특징이다. 그 속의 은유와 상징을 따지고 풀어보는것이 감상의 재미이기도 하다.‘강남’과‘단귤’하면 떠오르는 또 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굴원(屈原, BC 340-278)이다.철기시대를 맞아 비약적으로 상승한 생산력을 배경으로 천하의 패권을 위해 각축하던 전쟁의 시대(戰國)를 살며 굴원은 <귤송(橘頌)>에서“타고난 천품 바뀌지 않아 남쪽나라에서만 나는구나. 그 깊고 단단함 옮기기 어려우니 한결같은 뜻을 지녔음이라(受命不遷 生南國兮 深固難徙 更 志兮)”고 노래한 바 있다.

굴원은 <시경>과 더불어 중국문학의 원류로 꼽히는 <이소(離騷)>의 작자로, 본격적 서정시의 시조로 불리는 시인이다.극단적 난세에 섬세하고 강직한 성품의 지식인에게 가능한 길은 두 가지 뿐이었으리라. 은거 혹은 자살. 굴원은 결국 스스로의 몸에 돌을 매단 채 멱라강에 빠져 죽었다. 권력자 및 그주변인들과의 불화로뜻을펼치지못한­비범한지식인의 비극,이상과현실의타협불가­능한대치를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장구령이 좌천돼 형주(荊州)에 가 있던 시절의 <강남유단귤>은 굴원의 그것과 통하는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형주란 굴원의 나라 초국(楚國)의 수도이자 유명한 귤 산지였던 강릉(江陵)의 관할지다. 귤과 남쪽나라(강남), 그것들을 아우르는 계보로서의 굴원, 이로써 <강남유단귤> 문맥은 한층 자명해진다. 그러면서도 굴원만큼 비극적이지는 않음에 주목하고 싶다. 마지막 두 연을 통해 해탈의 경지로 현실의 고통을 승화시키며희망을 상상하게 해준다. 체념이라도 좋다. 출구도 대안도 없는현실에서때로는체­념또한힘이 아닐까.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일류시인의 한 사람 장구령은 당나라현종 시절의 명재상이다. 저 유명한 초한(楚漢) 대결시대 유방(劉邦, BC 256-195)을 승리로 이끈 걸출한 책략가, 통일제국한나라의 개국공신 장량(張良)의 후손이라는 점도 기억할 만하다. 자가 자수(子壽), 일명 박물(博物), 소주(韶州) 곡강(曲江, 지금의 광둥(廣東)성 샤오관(韶關)) 사람 장구령은 5-6세때이미 시를 읊조리고 대구로 화답을 할줄알아 신동으로 불렸다. 과거 급제 후 고급문관의 길을 걸었는데 현종(AD 685762, 재위 712-756)과는 동궁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다. 탁월한정치적 행정적 안목과 식견을 발휘해 사상 최고의 전성기‘개원의 치(開元之治)’에 공헌했으며 국가의 장래를 위한 충언을아끼지 않았다. 수도의 중앙관직을 우선시하는 풍조를 바로잡고자 지방관 인사를 중시하고 출신 아닌 능력 위주로 등용할것을 상소하는가 하면, 대유령(大庾嶺, 장시(江西)성과 광둥성경계) 옛길을 닦아 남북교류의 요로를 원활히 하기도 했다. 거대한국토의효율적경­영에불가결한지방행정­과교통인프라의의미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대국의 유능한 정치지도자에비견될 만하다.

어느덧 오랜 태평성대 속에 안일해지고 총기와 판단력을잃어가는 현종에게 간신배들이 꼬이기 시작한다. 충언 직언을서슴지 않는 장구령은 모함을 당하거나 좌천되어야 했다. 이런와중에 당 왕조는 내적으로 썩어가며, 필연의 파국인‘안사의난(AD 755-763)’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안록산의 위험성을일찍이 간파하고 그군사적 실수를 빌미삼아 처단할 것을주장했던 사람도 장구령이었다. 현종이 재상 후보의 자질과 품격을 가늠할 때 장구령 같은 인물인지 여부를 따졌다든가, 안사의 난 발발 직후 장구령의 간언을 무시한 자신의 실책을 통탄해마지않았다는것­역시유명한 이야기다.

두보는 장구령을 애도하는 시에서“(그의) 시가 끝나면그 이상의 것을 상상하고, 글이 끝나면 깔끔한 함축의 여운을느낀다(詩罢地有餘,篇終語清省)”고 칭송했다. 함축과 여운이라면 중국고전시의 태생적 미덕이자 보편적 매력 아니겠는가.두보 같은 위대한 시인에게 이런 평가를 받는 것은 시인으로서 인간으로서 장구령의 성취가 하나의 극점에 도달했었음을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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