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누구인가?’박웅규의작품세계를보다

China (Korean) - - 인물 - 글|왕자인(王佳音)

늦봄을 지나 초여름이 다가오는 계절, 베이징(北京)은 벚꽃이며 복숭아꽃 해당화가 어지러이 피었다지더니금세푸르른녹색으로 물들었다. 순식간에여름이훌쩍다가온 느낌이다.

올해는 박웅규 작가가 중국에 온 지 11년째 되는 해이다. 체크무늬 티셔츠에 니트카디건, 단정하게 탄 가르마와 정성스레 다듬은 듯한 수염까지, 박 작가는 필자가이전에접해본예술가들에비해훨씬더온화하고깍듯한분위기를풍기는 사람이었다.

그의작업실은베이징과 허베이(河北)의 경계지점인퉁저우(通州)구의 런좡(任莊)진에 있다. 도시의 소란스러움에서벗어나있고 쑹좡(宋莊)예술구와도 인접하여창작활동을하기엔안성맞춤인 곳이다.

그의 작업실은 외딴 정원에 있었다. 작은 정원에는붉은 벽돌로 지은 이층 건물이 한 채 있다. 건물의 바깥쪽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작업실이 나온다. 널찍한 방한 칸을 독서 공간, 창작 공간, 집필 공간으로 나누어다소 어수선하면서도 질서가 잡힌 듯 보였다. 2층에 있는 작은 다락방은 그의 작품실 겸 보관실이다. 그가 중국에 온 이후 창작한 작품과 각지에서 습득하거나 구매한 도자기 파편들이 쌓여 있다. 조각 하나하나에는 일련번호와 연대, 출처 등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이곳은 제가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곳입니다. 파편을 하나씩 집을 때마다 그 위에 소성된 무늬나 인물들이 실제살아있는 것처럼 제게 그 시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같다고 할까요.”그가 농담처럼 말했다.

그시대의뜨거운이야기들

1988년 한국에서는 88서울올림픽이 열렸다. tvN 드라마‘응답하라 1988’을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당시는 모두가 마음 속에 희망을 하나씩 품었고, 자아를추구하던 시대였다. 박 작가가 대학 캠퍼스를 밟은 것도바로이 시기였다.

1970년대 한국은 새마을 운동이 전개되며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고, 국민들의 생활 수준도 크게 향상되던 때였다. 하지만 동시에 인권과 자유를 요구하는 목소리도갈수록높아져 갔다.

그는자신이소속된교내미술학부동아리에적극참여하며중국의위대한문학가이자사상가인 루쉰(魯迅)이주장한‘신목각운동(新木刻運動)’, 즉‘대중을 위한 예

술’을 접하게 됐다. 그 뒤로 동아리 회원들과 함께 집회에쓰일포스터나만화를그리며시위대를위한정보전달활동을 펼쳤다.“지금 생각하면 그때 학생운동에 참여한것은어떤명확한동기가있어서그랬던건아닌 듯해요.자아에대한인식도아직명확하지않은 때였죠.”

1994년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박 작가는‘나는누구인가’라는 문제에대해진지하게고민하기 시작했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왜 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알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이런 목표의식을 가진그는창작을통해자신이주체가되고본체가되는작품을모색하기 시작했다.

당시사람들의많은존경을받던성철스님이입적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한때 스님이 남긴“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이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그는 오디즙을 이용해 성철 스님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작업 과정에서 그 안에 새겨진 의미를 깊이 탐구했고, 불교 사상에도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당시의모든시도는 그에게‘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대한자아탐색을 하는 과정이었다. 이후로도 여러 가지 창작 수단을동원해물음에대한답을찾고자 했지만, 속시원한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 시기에 창작한 작품들은 거의자아를찾기위한 반복적인‘실험’이나 마찬가지였다.

물음의해답을찾아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그는 여전히‘나는 누구인가’에대한해답을찾고 있었다. 자신의근원을찾기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속한 아시아에서 근원을 찾아야 한다고생각했다. 아시아문명의발상지가중국이라고생각한그는중국에서모든것의원천을찾아보자는생각으로중국행비행기에몸을 실었다.

그는중국에서유학하며수많은유적지를 돌았다. 다퉁(大同), 타이위안(太原), 둔황(敦煌), 시안(西安), 뤄양(洛陽), 상하이(上海), 항저우(杭州), 쑤저우(蘇州), 난징(南京), 선양(沈陽) 등지에서 막고굴, 후커우(壺口)폭포,병마용을 눈에 담았다. 가는 곳마다 전율과 함께 불교나유교 사상에 대한 스스로의 이해가 깊어지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여러곳을 돌아다니며 중국과한국간문화적유사성과차이도 발견했다. 자신이처한환경이나자아에대한인식에서도더높은차원의깨달음을 얻었다.

한국의미대입시는주로인상파의소묘분할을기준으로 삼지만, 중국은 고전주의 소묘 위주이다. 이때문에박 작가는 중국에서 미술 공부를 하며 적잖은 고생을 겪었다. 그는 2년 동안의연수를거쳐중앙미술대학유화과에 입학했다.“당시 중국에 와서 그림을 배우던 한국 유 학생들 대부분은 전공으로 국화(國畫)를 선택했어요. 그럼에도 제가 유화를 배우기로 결심한 까닭은 유화가‘나는 누구인가’에 대한해답을찾고그답을예술로표현하는데유용한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모델을대상으로한유화와소묘수업에서고전주의가 추구했던 예술과 기법을 배웠고, 야외 스케치 수업을통해서는인상파가추구하던예술과핵심기법을배웠다.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창작 활동에 전념했다. 중국을 여행하며 눈에 담았던 둔황석굴이나 한나라 화상석(畫像石) 등의 문화 유적에 자신의 어린 시절이나 인생에 대한 사색을 투영하고 표현하고자 했다. 문화의 근원을탐색하는과정에서불교와유교에대한사상도깊어졌다. 전통과 현대가 충돌하는 가운데 자신의 내면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다.“한 가지 물음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찾지못한다면계속그문제에 얽매이게 됩니다. 자유를완전히잃은것처럼오로지해답에만사로잡히기때문이죠.”박 작가의 말이다.

중국땅에홀로서서

졸업이 다가오자 같은 과 학생들은 각자 살 길을 찾아 나섰다. 그에게는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냐 중국에 남을 것이냐 하는 문제가 닥쳤다. 중국에 남아있자니 아는사람도 없고, 이렇다할직업을 찾기도 어려웠다. 한국으로돌아가자니자신이밤낮을고민하는문제에대한궁극적인답을아직찾지못했기때문에 내키지가 않았다. 중국에머문기간은 4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동서남북여기

저기를다녔기때문에이땅이마치자신의것인듯한느낌마저 들었다.‘베이징에서 한국까지는 비행기로 1시간남짓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라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결국그는중국땅에홀로남기로 결정했다.

중국에 남기로 결정하고 나니, 이제는 생계 문제를해결할 취업 자리를 찾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는 당시의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취업이 그리 순탄치는 않았어요. 전공으로보나외국인 신분으로보나딱맞는일자리를찾기가 어려웠죠.”하지만 그는들뜬 표정으로 기자에게 말했다.“속담에‘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天無絕人之路)’는 말이 있잖아요. 하늘이 정말 무너진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을 때, 마침 한 친구가 한국인들이 모여사는 왕징(望京)의 한 화실에서 그림을 가르치는 일을 소개해 줬어요.”안정적인 직업을 얻고 난 그는수업이 없는 시간을 활용해 다시 자신을 괴롭혔던 문제의해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럴때즈음지금의아내도 만났다.“이 사람이 언제 나타날 것이라고 한번도상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냥 아내가 제 앞에 나타난 순간‘아, 이 사람이구나’싶었죠.”박 작가는 그렇게 조선족출신의아내와 결혼했다. 아들은지금초등학교 4학년이다.

박 작가는 작업 틈틈이‘템페라화’도 그리기 시작했다. 학교다닐때의일부습작품을 정리하면서 서양미술과관련된기법이나재료를공부하기 시작했다. 내용적으로는 자아의 본성이 담긴 사상을 일상과 결합해 표현했다. 이과정에서 고전주의 기법에대한이해가더욱깊어졌다. 일련의 깨달음 덕분에 속박에서 벗어나자 심리적으로도자유를얻어다음창작을좀더여유있게진행할수 있었다.

인터넷의 발달은 그의 시야를 한층 넓혀 주었다. 지 금은 템페라화에서 유화와 아크릴화까지 섭렵하고 있다.인터넷으로 세계 여러 나라 예술가들의 작품을 찾아보며전에들어보지못한다양한재료들을 접했다.

그는 매일 작업 전에 향을 한 개씩 피워두곤 한다. 마음의 안정과‘자신과의 대화’를 위해서다.“자신과의 대화는 명상이자 사색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올바른 자신을 깨닫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명확히 아는 것이죠.”

예술을통한교류활동

수교이래중국과한국은예술분야의교류를활발히이어가고 있다. 양국예술계는관련인사들의상호방문이나 전시회 개최 등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있다. 박 작가는여러해동안양국 예술교류의‘친선대사’로도 활약하고 있다. 광주시립미술관 중국대표처를 담당하고 있기도한그는매년연수차 전라남도 광주에서오는한국작가들을중국에서맞이하고 있다. 정기적으로양국의현대작가들을초청해함께창작에대해토론하거나야외스케치를나가는등의행사를기획하고 있다.

광주시립미술관 중국 대표처는 그의 작업실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다. 네개의 공간 가운데 세 곳에는 한국작가가, 한 곳에는 중국 작가가 입주해 있다.“처음에는네 곳에 모두 한국 작가가 입주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러면 중국 작가들과 교류가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4개월 단위로 양국 작가들이 이웃해 살면서더많이교류할수있도록하고 있습니다.”

오랜 중국 유학생활을 거치면서 한국과 중국의 예술적 유사성과 차이점에 대해서도 느낀 바가 많다.“저는주로 현대예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 예술은 중국에 비해 수년이 앞섰고 중간에 맥이 끊기지 않았어요.중국은 시작은 늦었어도 몇 년 사이 굉장히 빠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양국 간 차이를 거의 느낄 수가없어요.”

일을하다보면각종행정적잡무가그의창작시간을빼앗기도 한다. 그러나중국에서오랫동안생활한한국의예술가로서 이미 이런 패턴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대신그는 자신이 지도했던 학생들의 작품 수준이 높아지거나고유의 색깔을 낼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그는 작은변화라도한눈에 알아보며, 그런변화를 발견할때가장뿌듯하다고 말했다.

‘일념’

그의 작업실 정면에는 멀리서 볼 때 붉은 색으로 보

이는 작품이 한 점 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사용했던 향을 가지런히 배열한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그가‘일념’이라 부르는 시리즈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일념’은 향을 원 재료로 사용했다. 향에 색을 입히고 향을마름질하거나, 태우거나, 붙이는 등 단순 작업을 반복해작품을 만들었다.

향을 원 재료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사람들이 사찰에서 향을 피우는 이유는 대부분안녕을 기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순간은 사람들의 마음이 가장 순수해지는 때이죠. 이것은 자아와 대화하는과정이기도 합니다.”

작품에 쓰인 향의 개수에 대해 묻자“처음에는 개수를 셌는데, 나중에는 헤아릴 수 없었다”고 답했다. 창작에걸린시간에 대해서는“매일 쉬지않고작업해서꼬박6개월이 걸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작품이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이전에 작업했던 어떤 작품보다도 제게 많은 생각거리와 소득을 안겨줬습니다. 동일한 작업을 반복하면서내가왜그림을배우는 것인지, 작품을하는이유는 무엇인지, 왜 이렇게까지 창조를 추구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반문했고, 그러면서 점점 제가 원하는답에가까워지는것을 느꼈습니다.”그가 털어놓았다.

박 작가는 사람의 모든 행동이 다 하나의 생각에서비롯된다고 본다. 그러고 나서 다음 행동이 이어지는 것이다.“어렵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사실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과 대화를 나눠야 해요. 계속해서 자신을 돌아보며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잊지 말라고스스로에게다짐을하는 거죠.”

그는 작품 활동을 하는 예술가이면서도 수집광이기도 하다. 골동품 시장에서‘건진’중국 최초의 미술 잡지 <미술>을 두근대는 마음으로 한 권 꺼내 들어 출판년도를 확인했다.‘1958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평소에도 오래된 물건, 옛날 레코드, 석유램프, 동(銅)나팔등을발굴해집안구석구석에‘쟁여 놓곤’한다.

인터뷰말미에 결국‘나는 누구인가’에 대한답은찾았는지,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는지 물었다. 그가 웃으며말했다.“아직도 찾는 중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작품을통해저의내면세계를표현하기시작한 만큼, 저의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공감을불러일으킬수만있다면더바랄게없습니다.” (미서명 사진은 본인제공)

한국예술가박웅규 사진/궈사사(郭莎莎)

방법지외(方法之外),대상(大象)아트스페이스,타이베이.타이완참여예술가와함께

박웅규예술가는중국옛미술잡지를수집하는취미가있다.사진/궈사사

박웅규예술가의 <일념>시리즈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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