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na (Korean)

박소빈,연필끝에서솟아오르는­아시아의용

- 글|왕자인(王佳音)사진|궈사사(郭莎莎)

용,예로부터 용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서‘신(神)의 화신(化身)’으로 여겨져 왔다. 용에 얽힌 무수한전설이전해 내려오고, 용과관련된문화는 어디에서나 눈에 띈다. 사람들은 이처럼 신성(神性)이 가득한용의존재와그에 얽힌 이야기를 문자로 기록했고, 건축에 용의 모습을 새겨 넣거나 애니메이션을통해용의­총기를드러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 가장 소박하고, 가장 기본적인 수법으로 용의 모습을 스케치하고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풀어내는 한 명의한국화가가 있다. 그주인공은바로박소빈 화가다. 그녀는 한국 화가로는 최초로베이징 진르(今日)미술관에서 개인전을열었다.

수박밭의 꼬마 화가

박 화가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몹시좋아했다. 그것도 여타 취미에 비해 그림만큼은 거의‘중독’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한번은온가족이소풍을­간적이있어요. 아빠가저를수박밭에데­려 가셨죠.밭 옆에는 초가집이 있었고요. 낮에 잠깐쉬는 동안 저는 초가집으로 가서 아빠를찾았죠. 그때 아빠가‘여기까지 왔으니그림을 한번 그려보라’고 하셨어요. 그때는초가집 안에 있으면서도 초가집이 어떻게생겼는지조차 몰랐어요. 그래서 그냥 느낌에 따라 그림을 그렸죠. 아빠도 옆에서‘한번마음가는대로 그려보라’고 응원해

주셨어요. 그렇게 우리는‘수박밭의 초가집’이라는 작품을 완성했죠. 그때 아빠와함께 그림을 그리던 정경이 아직도 눈에선해요.”

초등학교도들어가기전­어린박화가가 자주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본 아빠는 딸이정말로그림을좋아­한다는사실을알고박 화가를 어린이 미술학원에 보냈다.“그때부터미술학원에서­쉬지않고그림공부를 했어요. 지겹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적이 없어요. 가족들과 선생님들도‘잘 그렸다’면서 늘 저를 격려해 주셨고요. 그림은아주 자유로운 예술인 것 같아요. 형식에구애받지 않으니까요. 음악에는악보와리듬이 있잖아요. 수공예도배합되는재료­에맞춰 순서에 따라 진행해야 하고요. 어쩌면이렇게자유롭기­때문에그림에흥미를 보였던 것이 아닐까요.”박 화가의 말이다.

아빠는 그림을 배운 적이 없지만 박화가의 기억에 아빠는 그림에 매우 정통한 분이었다. 어린 시절 함께 그림을 그렸던 기억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아빠는저를 데리고 영화나 연극, 전시회를 자주보러 다니셨어요. 또제가 그림을 그리면 무척 좋아하셨죠.”과거를 회상하는 박화가의눈속에행복이­넘쳐 흘렀다.

박소빈(朴素贇)이라는 이름도 아빠가직접 지어주셨다. 그 중에서 글월 문(文),무예 무(武), 조개 패(貝)가 합쳐진‘빈( )’이라는 글자는 한국인들에게 낯설 뿐더러 이름으로도 잘쓰지 않는 글자다. 박화가는 본인 이름의 유래에 대해 이렇게설명했다.“아빠는 한자를 많이 알고 계셨어요. 동네 아이들 이름도 다 아빠가 지어주셨죠. 제 이름을 지어주실 때도 엄청고민을많이 하셨대요. 딸이박학다식하면서힘­도 세고, 재물도 갖기를 원하셨어요. 사실아빠는 사람이 아는게있으면 돈은저절로따라온다고 생각하셨죠.”

박화가가여태껏그림을­공부한과정을 들어보면 누가 시켰다거나 싫은데 억 지로 연습했다는 내용이 하나도 없다. 그림은 항상 삶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그녀와 함께 했다. 예고 입학을 결정할 시기에 이르자, 사춘기를 겪던 그녀는 한참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예고에 진학하면분명대학에서­도예술을전공할것이고, 졸업 후에 예술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게 될 터였다.“(선택의) 범위가 점점 좁아지는 거예요. 그때 아빠가 말씀하셨죠. ‘자신의 선택을 믿어라. 그렇게 그림을 좋아하고 그림과 잘 맞으니, 우리 딸은 분명잘 해낼 거라 믿는다’라고요. 이제까지 가는길마다아빠가보내­주신기대와격려를한시­도 잊은 적이 없어요. 아빠에게 정말로마음깊이감사를 드립니다.”

예술계에는 여러 이유로 여성 예술가의수가 남성보다 훨씬 적다. 한국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아빠는그녀­의가장든든한지원군이­되어주었다.“아빠는 제가 여자아이라고 해서저를틀속에 가두려 하시지 않았어요. 항상‘내 딸은 그냥 박소빈일 뿐이다.내딸이하고 싶은 일을 하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계셨죠. 새로운 도전을 시도할때도 그랬어요. 늘 저에게 한번 해보라고조언하셨죠.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는 걸 어떻게 아냐면서요. 그래서 저는 늘 오롯이저스스로의삶을­살수 있었습니다.”

1989년 그녀는 국립목포대학교 예술과에 입학했다. 입학 때부터 그녀는 동기들을 뛰어넘는 자신감과 창작력으로 두각을 나타냈다.“물론 제가 예고를 졸업했기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던 거겠죠. 대학에서는 전시회나 서적을 통해 세계각지의작품들을접­하면서예술을더욱체계­적으로배울수 있었어요. 교수님들도항상저희에­게작품활동을많이하라­고권하셨고, 과감히 창작을 하라고 하셨죠. 덕분에 대학생활을 무척 알차게 보냈던 것같아요.”

용의 기원을 찾아

1995년 조선대학교 대학원을 다니던박 화가는 처음 중국땅을 밟았다.“논문제목이 <중국과 한국의 용등(龍騰) 조형예술 연구>였거든요. 지도교수님이 제목을보시자마자중국­에가서연구를해야한다­고 하셨어요. 그길로 비행기표를 사서선양(瀋陽)으로 날아갔죠. 당시 옌지(延吉)의한 마을에 들렀다 다시 베이징(北京)으로갔던기억이 나요.”

짧은 중국여행이었지만 인상은 매우

선명하게 남았다. 그때까지 그녀의 모든공부와일상은한국­에서만 이뤄졌었다. 한국에서 무척이나 자유롭고 편안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해 왔고, 해외로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중국 방문이 그녀의 생각에 작은 변화를 일으켰다. “용은 동양문화의 화신이잖아요. 자연히용의 발상지(중국)로 가서 연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해야 더욱객관적이고 종합적인 연구 결과를 얻을 수있을 테니까요. 그때는 중국에 와서 공부할 기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어요.”

2009년 박 화가는 뉴욕 첼시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첼시갤러리 사상 처음으로 아시아 작가가‘용’을 주제로 개최한 전시회였다. 상징적 의미로 가득한 용의모습은수많은외국­관람객들의눈길을끌었­다. 박 화가는 연필로 애틋한 러브스토리를 풀어냈고, 선을 통해 동양 소녀의아름다움을 표현했다. 해외관람객들은한국의 화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박화가의부친이­광주미술관관장이라는­소문까지 돌았다.

전시회가 끝난 후 박 화가는 곧바로‘부시윅 오픈 스튜디오(Bushwick Open Studio)’의 레지던시(입주작가) 프로그램에합류하며공­식적으로첫외국생활을­시작했다.“그때는 인터넷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아서 한국하고는 이메일로밖에 연락이안 됐어요. 다행히 전시회 반응이 좋아서전시기간이계속 연장됐지요.”

낮에는바쁜전시활동에­집생각을할겨를이 없었지만, 밤이 되고 주변이 고요해지면 홀로 숙소로 돌아와 멀리 한국에있는 부모님 생각에 잠기곤 했다.“종종지붕 위에 올라가 공항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구만리 밖에 있는 한국을 그리곤 했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눈가에서 눈물이흘러나왔어요.”겉으로는 강인해 보이는그녀지만, 속으로는 한없이 소녀 같은 연약함을간직하고 있었다.

박화가는 1년 반이지나뉴욕생활을끝­내고한국으로 돌아왔다. 7개월 뒤다시광주미술관의 레지던시 프로그램 참여차베이징을 방문했다. 미국에 비하면 중국은비행거리가 2시간도 채안되기때문인지 몹시도 가깝게 느껴졌다.“아시잖아요,같은 동아시아 문화권 사람들은 하나 같이 검은 머리에 노란 피부인걸. 그래서인지금세심리적­으로거리가좁혀지는기­분이었죠. 사실 가려고만 하면 언제든 부모님 곁으로 갈수야 있었어요.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오히려 오랫동안 중국에 머물기로 결정을 했죠. 지금 생각해 보면오늘진르미술관에­서개인전을열수있었던­것도 여러 가지 원인과 결과가 맞아 떨어져서인 것 같아요. 중국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졌기때문에여기­계속머물기로결정했고, 그 덕분에 다양하게 교류할 기회를얻게 되었죠. 또그런 기회가 하나씩 쌓일때마다 여러 평론가들을 알게 됐고, 그분들의 추천 덕에 이곳에서 개인전을 여는행운까지누리게되­었으니 말이죠.”

드넓은 초원의 여백

그녀의 중국 유학생활은 그야말로‘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었다.“저는 베이징이 좋아요. 여기에는 오래된 전통 문화가 있고, 현대적이고 세련된 건축도 있거든요. 자금성이나 베이징 뒷골목(胡同)을 걸을 때면 시간이 그대로 멈춘 듯한느낌이 들어요. 반면 싼리툰(三里屯)이나궈마오 중심업무지구(國貿·CBD)를 지날 때는 새로운 시대의 활력을 여실히 느낄수 있죠.”

중국에서산지도어느새 8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2012년과 2014년 베이징 포스갤러리(富思 廊)에서 두 차례개인전을 열었다. 2016년 상하이 히말라

야뮤지엄과 광주시립미술관이‘이무기의꿈(螭夢)’을 주제로 공동 주최한 전시회에도 참가했다. 그 밖에도 광주, 서울, 뉴욕에서 잇따라 11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중국에서는수많은주요­단체전에작품을출품했­다. 2009년에는 광주시립미술관 젊은예술가상을수상하­기도 했다.

지난 9월 23일에서 10월 29일, 베이징 진르미술관에서 <화룡(化龍), 무한(無限)>을 주제로 그녀의 개인전이 열렸다.진르미술관은‘전위적풍격과남다른비­범함, 산업시대의 흔적과 현대적 사상이 결합된 독특한 미학적 품격’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유명 건축디자이너 왕후이(王暉)가 설계한 갤러리 공간은 현대 예술로 하여금무한한가능성을­펼치게 한다.

사실중국에서예술교류­를하거나유학, 창작활동을 한 한국 예술가들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진르미술관에서­개인전을연 한국인은 박소빈 씨가 처음이다. 박화가는 이를 무한한 행운과 영광으로 여긴다. 작년 초 진르미술관 전시기획자가 그녀에게 연락을 한 이후 올해 9월 전시회오픈 때까지 꼬박 1년 반 동안 다른 전시회기회를 모두 거절한채오로지 이번개인전에만 매달렸다.

박 화가는 전시 기간 내내 관람객과언론 매체를 맞이하는 틈틈이 폭 20m, 높이 3m에 달하는 거대 그림을 완성하고 있었다. 인터뷰를 할 당시에는 이미 마무리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화폭 아래 지면에는 흑연가루가 소복이 쌓였고, 화가의손은오랜작업탓­에굳은살이 도톰히박혀 있었다. 그녀에게서 예술과 창작에 대한 애정을 느낄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를가까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염되고마는하나의 신념이자, 내면의열정이기도했다.

전시기획자이자 평론가, 진르미술관학술디렉터­이기도 한 황두(黃篤) 쓰촨(四川)미술대학 중국예술사회연구소 연구원겸 미술학과 교수는 박 화가를 이렇게 평가했다.“일반적으로 현대 예술에서 화가가 스케치로 개인전을 여는 것은 상당히 ‘모험적’인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케치같은매개물은정­통예술형식으로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스케치는보통화가의전­체창작구상에서친필원­고나소재에서중요한모­티브역할을할뿐입니다. 하지만 박 화가는 스케치와 창작을 분리하지 않고 이 둘을 하나의 유기적인예술체로 인식했습니다. 스케치를현대 예술의 표현매개를 넘어 자신의 예술철학을재현하는방­법으로삼은 것이죠.”

필자가보기에박화가의­그림은몽환적이면서도­신화적색채가 가득하다. 여성의 매혹적인 감수성마저 흐른다. 이처럼신비로운 기운은 그녀만의 독특한 화법에서 유래한다. 연필 끝에서 상상력 넘치고차분하면서도 동적인 흑백 톤의 이미지가탄생한다. 과거의 신화를 연극적 요소가가득한 시각적 서사로 풀어내고, 언뜻 어수선해 보일 수 있는 선들을 조화롭고 질서를 갖춘 회화 패턴으로 정리한다. 정적인듯 동적이고, 무질서 속에 질서가 있으며, 고전과 유행 사이에서 회화로서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낸다. 그녀의 작품에는 자신만의 회화기법과 언어적 논리, 서사적 미학이 담겨 있으며, 예술적 화법을 자신만의언어로재구성­하고그안에의미를새롭­게 부여한다.

진르미술관의 가오펑(高鵬) 관장도박화가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가오관장은“박 화가는 새로운 회화적 언어를모색하는 한편, 아시아의 신화와 현대 페미니즘의관계속에서­새로운시각적경험을 창출하려 한다. 그녀는 화필을 통해전통신화 속 영수(靈獸), 사랑, 관계 따위를완벽하게 표현해 냈다.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은근하게 아시아의 차세대 현대 여류예술가로서참신한 풍모를 드러내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박 화가는 창작 영감을 얻기 위해 중국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 그 중에서그녀가가장좋아­하는지역은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다.“네이멍구 초원에 담긴 여백의 화면이 좋아요. 드넓고, 조용하고,무한한 상상의 여지를 주죠. 그 안에 있으면 저 자신이 무척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고, 동시에 천지자연과 하나가된 느낌을 받아요. 여유가 있을땐 1년에도 몇 번씩 네이멍구 초원에 가서 멍하니 지내거나 말을 타곤 하죠. 자유롭게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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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화가는소탈한연필드­로잉으로애틋한러브스­토리를풀어낸다.전시기간화가의대형작­품도동시에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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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3일에서 10월 29일까지베이징진르­미술관에서<화룡(化龍 ), 무한(無限)> 을주제로박소빈화가의­초대전이열렸다.사진은화가의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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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빈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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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드로잉을하며몇자­루의연필을썼는지화가­자신조차기억하지못할­정도다.화가의손은오랜작업탓­에단단히굳은살이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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